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0장] 프롤로그



직함의 미학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을 대학강단에서 보냈다. 돌아보면 변한다던 강산은 안 변하고 우직하게 그대로 있는데 사람이, 사회가, 세상이 변해온 세월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때로는 학생들의 젊음과 도전에 응원을 보내고, 때로는 그다지 경쾌하지 만은 않은 현실에 자조 섞인 한숨을 짓기도 하고, 또 때로는 미세먼지 같은 세상 속에서 맑은 공기를 찾아 몸부림치던 시간들이었지 싶다. 아직은 젊고 많은 시간이 남았으므로 뒤돌아보며 지난 시간들을 정리해봐야 할 시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데, 십 년이라는 세월 혹은 열이라는 숫자가 주는 무게 감이, 아무도 나에게 주어주지 않은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변해 버렸다. 사람들 앞에서의 독백이라는 과제.

어쩌면 세상 사람들 앞에서의 첫 번째 독백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방학이라는 보너스를 제외하곤 강의실에서, 방송국에서, 세미나에서, 내내 말을 통해 생각을 전달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내게 사람들은 뜬금없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지난 십 년을 돌아보면 내가 다른 이들에게 말을 건넬 때는 항상 누군가의 페르소나를 입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본다. 일단 대학교수라는 가면과 옷이 내게 입혀져 있었다. 이 시대 이 사회 지성과 윤리의 상징, 미래의 인재를 육성하는 과중한 업무와 특권을 부여 받은 사람들 속에 나도 묻혀 있었다. 주변에선 열정적이고 의미 있는 강의였다고 격려해기도 으나 사람들 앞에 선 매 순간 순간이 손에 땀을 쥔 긴장의 연속이었다. 한 해 한 해 흘러갈 때마다 짙게 물들어가는 매너리즘을 목격하며, 안티의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색깔을 쫙 뺀 무채색의 자아를 만들어가며, 그러한 관성과 싸워 볼 용기조차 내보지도 못하며, 그렇게 체면과 가식과 위선의 세계에 익숙해져만 갔다. 그렇기에 내가 느낀 긴장감의 정체는 아마도 나약함에 대한 반성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환희의 순간들이 있었다. 젊은이들이 부족한 나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볼 때, 강의 평가 만점을 받았을 때, 어렵게 쓴 연구논문이 출간이 되었을 . 솔직히 고백하면 이런 순간들은 내 인생에서 신에게 받은 축복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만큼 부담은 백배가 되곤 하였다. 신이 내린 축복은 내 양 어깨에 얹어놓은 커다란 짐에 다름 아니라는, 신에 대한 얄궂은 애증이 생겨나곤 했다. 오히려 진정한 환희를 만끽했던 순간은 내가 나를 타인에게 솔직하게 표현하였다는 느낌을 경험할, 바로 그 때가 어느 때보다도 즐겁고 떳떳했다. 사실 녹녹지 않은 세상에 대처하는 처세술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나에게 유일한 무기는 솔직함이었다. 항상 나 자신을 갈고 닦고 연마하되 남들에게 만큼은 솔직하게 나를 표현하는 나름의 처세술을 터득하였다. 때로는 그 솔직함 때문에 모난 돌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 또한 즐거웠다. 적어도 위선에 항거하였다는 자부심이 샘솟았으니까.

백을 준비하며
어느 새 소통이라는 두 글자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화두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소통이 반드시 말과 글을 통해서 행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기업가는 사업을 잘 일구어서 상품을 통해 소비자들과 소통하면 되는 것이고, 교수는 연구와 교육을 열심히 하여 학생들과 소통을 하면 되고, 예술가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통해 관객들과 소통하는 것이 정도이지 싶다. 언론의 힘이 여전하고 SNS가 범람하는 시대, 말 몇 마디, 글 몇 글자로 위선과 가식을 포장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목격하며, 차라리 그보다는 무언이 진실된 소통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였다.

나는 소통을 하려 하는 게 아니다. 소통이 내게 아름답게만 각인되어 있다면 거부할 필요도 없고, 나의 작은 행동을 그 언어로 포장해 볼만도 하겠건만, 이 세상의 소통이 어느 새 정치 용어가 되어 있기에 나름 교만하게 소통을 거부하고자 한다. 이 시대의 생존원리와도 같이 되어버린 소통을 거부하는 것은 소통의 대전제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통의 대전제란, 바로 설득이다. 소통과 설득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많은 이들이 소통을 선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소통의 목적은 설득에 있다. 언어를 통한 마음의 전달을 통해 상대방의 나에 대한 태도를 우호적으로 만드는 것. 여느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이 동의하는 설득의 메커니즘이다. 많은 정치인들이 소통의 당위성을 외치고 또 외치는 이유도 그것이 결국 유권자를 설득하여 득표로 귀결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설득이 하등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결국 전략의 차원이라는 점을 깨닫고 소통을 바라보게 되면, 현실 속의 소통은 안타깝게도 이미 순수성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해서 대신 내가 택한 대화의 방식은 솔직한 독백이다. 장황하고 지루하고 거추장스럽게 들릴지라도 나의 솔직한 마음을 잘 엮어서 사람들 앞에 내놓으려 한다. 설득을 의도하지 않는 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적어도 선함을 덧입힌 소통을 부르짖고 싶지는 않다. 이쯤 되면 내 독백에 대한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소통이 목적이 아니라면 독백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서. 2013년 가을 즈음 그림 전시를 한 적이 있는데 전시회를 열게 된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곤 했다. 그 때마다 그림이 좋아서라는 피상적인 답변을 하곤 했, 일부는 그림이 좋으면 혼자 그리며 즐길 수도 있는데 전시회를 여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집요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물론 세속적 욕심도 있었다. 화단에 데뷔하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을 치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관객을 필요로 이유는 바로 본능의 표이었다. 내가 그린 그림을 사람들 앞에 전시하는 것이 일종의 주체할 수 없는 예술적 본능이라는 것 또렷이 인식했. 딱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본능의 차원. 그래서 피아니스트들이 연주를 하고, 무용수들이 춤을 추고, 영화감독들이 작품을 상영하는 데 있어서 공간과 관객들이 그들의 예술적 본능을 채워주는 고마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나의 독백의 이유가 어느 정도 뚜렷해졌다. 매우 단순한 이유, 내가 가진 본능의 발산.

와인인가
이제 좀 더 심오한 개똥철학을 이야기 하려 한다. 지금으로부터 강산이 두 번 정도 변 세월이 흐르기 전, 처음 미국에 유학 가서 접한 최초의 심리학 이론이 태도 이론이었다. 문화의 차이인지는 몰라도 처음 태도라는 개념을 학문으로 접했을 머릿속을 스쳐간 뉘앙스는 권위와 도덕과 예의가 뒤엉킨 아주 의미였다. 한국의 경우 주로 단어가 사용된 맥락이 다소 훈육적인 상황이 많아서 그런 같다는 생각을 나중에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태도이론가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던 미국인 교수가 설명한 태도의 개념은 심플함 자체였다. 좋고 싫은 . 들어준 예시도 유아스럽기 그지 없었다. 사과는 좋고 오렌지는 싫고 하는 식의 설명. 물론 태도이론은 심리학 뿐만 아니라 마케팅, 정치학, 경제학 인접학문에서 인간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설명하는데 근본이 되는 심오한 이론이라는 사실을 나중에는 알게 되었으나, 다소 원초적이다 싶은 강의를 들으며 점차 몰입하고 심취해가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 문득 생각은 과연 나에게 태도란 게 존재했던가 였다. 야구에 광적인 흥미를 느꼈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그다지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다. 되면 되면 조상 탓이라고 나의 불분명한 정체성을 한국사회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개인을 앞세우기 보단 집합적인 문화를 존중하는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나를 앞세우기 보다 카멜레온처럼 나의 색깔을 항상 주변에 맞춰서 살아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랑비에 속옷 젖듯이 다가왔던 것 같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니 종종 식사모임을 하게 되었고, 처음 한 두 잔은 무관심하게 그저 대화의 조미료 정도로 생각하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후에 한 때는 약간의 허영도 있었던 것 같다. 술 문화 만큼은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데서 매력을 느끼던 나에게 와인의 우아하고 세련된 외양은 내 마음 깊은 에 자리잡은 상승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한 두 권의 와인 관련 서적을 읽었고, 들은 풍월을 사람들 주목을 끄는 대화 소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언제인지 분명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오래 이거다 싶은 와인을 만난 순간 이상하게도 나는 이 십 년 전 미국 유학 시절 심리학 첫 강의 시간을 떠올렸다. 태도와 처음 조우하며 난 왜 태도가 블랙홀로 존재하는가 끊임없이 원망하던 그 때가 선명히 떠올랐다. 아마도 어떤 대상을 접하며 찰나의 순간에 좋다는 느낌이 툭 튀어나온 경우를 생전 처음 경험했기에 나의 이상향이자 족쇄가 되었던 태도의 심리학을 대번에 떠올린 것 같다. 나에게도 태도가 존재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그제서야 찾아왔던 것 같다.

그렇게 열린 나의 와인의 세계는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오묘하고 야릇했다. 국내외의 와인 전문가들이 이야기 하듯이 와인 한잔에는 정말로 삼라만상 우주가 담겨있는 듯하다. 와인을 마시며 내가 생전 가보지도 못했던 곳이 오감을 통해 연상되기도 하고, 자연이라는 거대한 성을 이루고 있는 주춧돌 하나하나를 느끼게 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스토리가 폭죽 터지듯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러다 보면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가소로워 지기도 한다. 그러한 우주를 내 손에 든 잔 하나에 담고 있다는 느낌은 결국 나를 더없이 겸허하게 만들었다. 세상을 다 가졌다고 느끼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겸양의 자세를 이제 나도 막 가지기 시작했다. 진정 축복이다. 내게 와인의 세계를 열어준 그 와인은 그다지 비싼 축에 들지 못한다. 만원 조금 넘는 가격에 구매를 했으니 물론 다른 주종에 비한다면 와인이 다소 고가인 것은 분명하지만, 만원을 호가하는 다양한 와인 가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저렴한 축에 드는 와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인은 나의 든든한 이 되었다. 척박한 세상의 사회인으로 살아가며 마음 이곳 저곳 생채기가 났지만 그럴 때마다 내 손안에 든 우주가 그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아직은 숙련되지 않았지만 호연지기의 기개로 인간세상의 사사로운 갈등에 초연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 이 시점 나도 내가 앞으로 어떠한 이야기를 풀어갈지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와인을 통해 나는 사람을, 사회를, 세상을 이야기할 것이다. 와인에 입문한 지 불과 수년 밖에 안된 사람이 늘어놓는 이야기에 얼마만한 신뢰를 가질지 의문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와인 전문가를 자처하지 않겠다. 와인에 관한 전문적 지식을 쌓을 수 있는 무수한 책들이 있기에 내 책은 그런 면에서 도움이 지 못한다. 다만 내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와인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심연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하던 나의 태도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 삼라만상의 우주, 와인에 다가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은 본능 때문이다. 확인할 방법은 없겠지만 원대한 바램이 있다면 이 책이 출간된 이후에 독백을 들은 청중들의 마음 속 생채기가 조금은 치유되기를 바란다.

2015. 3. 21. 


저자 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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