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7장] 윈터 원더랜드 피노 누아

우아하고 관능적인 그러나 금방이라도 깨질 듯 약한 피노 누아 와인은 나의 연민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연민은 금새 나의 외부 세계를 향한 손길로 변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윈터 원더랜드를 경험해 보기로 하였다.


어렸을 누가 내게 여름이 좋은지 겨울이 좋은지를 물으면 서슴없이 겨울이 싫다고 답했다. 대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얗게 내리는 만큼은 더없이 낭만적이지만 그것도 잠시, 꽁꽁 눈길에서 미끄러져 봤다거나 밤새 위에 수북이 쌓인 눈을 긁어내려 애를 써봤다면 그런 낭만은 금새 사라진다. 어려서 겨울이 싫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성격인지 몰라도 사람들의 얼굴 표정에 유난히 민감했던 나는 겨울의 거리에 나가서 보면 사람들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 있다는 알았다. 혹한에 활기찬 웃음은 사라지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움츠리고 다들 이마 눈썹 주위에 주름을 그리고 걸어 다녔다. 분명 내게 찡그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거리의 무드랄까 아무튼 그런 것이 우울하게 조성되는 거 같아 내심 불평을 하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정서가 주위의 무드에 그다지 크게 휘둘리지 않게 때부터 나는 겨울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단 크리스마스가 있는 계절이라는 점이 마음을 이끌었고, 지금은 과일과 곡물의 제철이라는 것이 없어졌지만 군고구마, 햇귤, 그리고 호빵의 계절이라 생각하며 겨우내 마음 온기를 불어넣곤 했다. 누군가 내게 피노 누아 와인이 어떻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겨울 같은 와인이라고 답할 거다. 사실 여태껏 내가 마셔 피노 누아 와인들이 그다지 유쾌하게 느껴지지 못했기에 와인을 접했던 초창기에는 싫어하는 와인이라고 선을 분명히 긋기도 했다. 여러 지역의 와인을 다양하게 시음해보고 있는 지금은 일종의 학구열이 와인 세계의 지평을 열었는지는 몰라도 와인 코드를 최대한 배제하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와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배움의 자세로 피노 누아를 대하게 되었다.

피노 누아는 프랑스에서 보르도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부르고뉴 지방의 대표 레드 와인 품종이다. 와인의 신세계가 개척된 이후 재배 면적으로나 생산량으로 미국과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등이 원산지인 부르고뉴를 앞서가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피노 누아의 정점은 부르고뉴 산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사실 나의 와인 코드가 다소 보르도 지향적이라서 그렇지 피노 누아는 많은 와인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와인이다. 세계를 통틀어 가장 비싸고 매력적인 와인으로 일컬어 진다. 캐런 맥닐의 경우 잔의 피노 누아를 마시는 것은 흡사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정도로 에로틱하고 관능적으로 묘사되곤 하는 거의 유일무이한 품종이다. 하지만 피노 누아 와인을 마시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라고도 표현한다. 아무리 이름난 피노 누아 와인이라 할지라도 실망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니 품질이 안좋은 부르고뉴 와인은 오히려 기분을 우울하게 정도라는 것이다.[i] 그러니 내가 피노 누아로 그다지 감동을 못 받았던 게 지나치게 주관적인 판단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중세 유럽이 암흑의 시대라고 규정짓지만 실상 부르고뉴의 경우를 통해서 보면 프랑스 와인의 역사는 중세 수도승들에 의해 기초가 닦였다고 봐야 한다. 특히 떼루아를 중시하는 전통도 수도승들이 기후와 토양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요소들에 대해 세밀히 관찰하여 기록한 내용이 전해지면서 정교화되었다. 한 예로 20세기 프랑스에서 아펠라시옹(appellation) 체계가 확립되기 훨씬 중세시대 베네딕트 수도사와 시토 수도사들은 이미 부르고뉴의 포도원과 와인을 등급화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포도원에서 생산된 와인 조차도 품질에 따라 등급으로 분류하곤 했다. 경사면의 가장 아래에 있는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은 수도사를 위한 와인, 중간 경사면의 와인은 왕을 위한 와인, 그리고 꼭대기 경사면 포도의 가장 훌륭한 와인은 교황을 위한 와인으로 분류했던 것이다. 이처럼 떼루아를 중시하는 전통은 부르고뉴 와인 생산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일단 포도원 구조의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부르고뉴에서는 포도원이 소유권에 의해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떼루아에 의해 구획이 나뉜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포도원을 예로 들면 포도원 내에 떼루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사람이 소유했다면 개의 포도원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 포도원이 법적 소유권에 의해 정의된다고 있다. 반면 부르고뉴 포도원은 세기 수도승들이 오직 떼루아에 기반하여 정리한 구획에 따라 구분이 된다. 따라서 미국적 관점에서는 개로 간주되는 포도원이 부르고뉴에서는 떼루아에 따라 심지어 이상의 구획으로 나뉜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포도원도 여러 명의 소유주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ii]

이렇게 떼루아에 의해 나뉘어진 포도원 구획을 도멘(domaine)이라고 하는데, 부르고뉴의 도멘은 보르도의 샤토(chateau) 차이가 있다. 샤토의 경우 미국적 개념의 소유권에 기반한 영토의 개념에 가깝고 샤토 안에서 포도의 재배부터 양조, 숙성, 병입에 이르기까지 와인 제조의 과정이 진행된다. 이에 비교할 없을 정도로 크기가 작은, 심지어는 단지 줄의 포도나무들에 불과한 경우도 있는 부르고뉴 도멘은 주로 포도를 재배하는 구역이라는 개념이 강하고 양조와 병입 나머지 와인 제조는 네고시앙(négotiant)이라 불리는 와인 상인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네고시앙들이 여러 재배자들로부터 포도 원액을 구입하여 블렌딩한 자신의 이름을 붙여서 판매하고는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러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도멘의 포도 재배자들이 병입까지 완성하여 도멘의 이름을 붙여 팔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현격히 줄어든 포도 원액의 공급량에 난처해 하던 네고시앙들은 직접 포도를 재배하여 와인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명의 유명 네고시앙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네고시앙 와인은 도멘 와인에 비해 매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iii]

떼루아를 특히 중시하는 전통은 포도원 체계 뿐 아니라 와인 양조에서도 드러난다. 보르도와 대비되는 부르고뉴 도멘 와인의 두드러진 특징은 블렌딩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포도원에 여러 명의 소유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결국 포도 재배자가 특정 마을 안에 여러 개의 도멘을 소유하는 경우도 일반적이란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도멘에서 수확된 포도들을 같은 피노 누아 품종임에도 불구하고 블렌딩 하지 않는 게 부르고뉴의 전통이다. 이유는 부르고뉴 포도 재배자들이 와인은 떼루아의 표현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멘이라 불리는 포도원내 특정 구역 떼루아의 캐릭터를 온전히 와인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부르고뉴 피노 누아 와인에 실망을 해본 경험을 가지게 된 이유는 부르고뉴 떼루아의 조건과 피노 누아 품종의 특징에 따른다. 서늘한 프랑스 북부의 기후에서는 포도가 잘 익지 않아서 그 점이 포도 재배자들의 주요 걱정거리가 되어 왔다. 수확 시점 또한 주요 골머리가 되 . 가을에 비가 많이 내리는 부르고뉴 이기에 일찍 수확을 하게 되면 포도가 채 익지 않아서 좋은 캐릭터의 와인을 생산할 수가 없는 반면, 늦게 수확을 하면 비 때문에 낭패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대부분 일찍 수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이는 부르고뉴에서는 발효 과정 중 당분을 첨가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었기에 일찍 수확한 포도가 정 좋은 향미를 낼 만큼 익지 않았을 경우 여차하면 설탕을 추가하면 되는 보완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품질의 와인은 이러한 가당을 하지는 않는다.[iv]

숙성과 필터링도 역시 문제가 되곤 한다. 미국의 경우 일반적으로 매년마다 새 오크통을 숙성에 사용하여 와인의 맛을 더 깊게 하고 숙성에 따른 부케향을 이끌어내는 반면, 부르고뉴에서는 새 오크통을 매년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와인의 찌꺼기를 걸러내는 필터링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처럼 오크통 사용와 필터링을 특히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피노 누아 품종 자체가 너무나 약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칫 잘못하는 경우 고유의 향미를 다 잃게 되어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다.[v] 따라서 정말 좋은 캐릭터의 부르고뉴 피노 누아 와인을 생산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고 이러한 경우 매우 고가에 판매되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볼 때 많은 대중들이 좋은 부르고뉴 와인을 웬만한 가격에 맛볼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보는 것이다.

에릭 에릭슨(Erik Erikson) <유년기와 사회>라는 책에 기술한 주장에 따르면 자아는 이드(id) 초자아(super ego)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서 개인 내면의 질서를 유지하고 행동을 조절하여 현실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내적 체제이다. 프로이트 심리학 저술을 두 권 접했다면 이해할 있는 이드는 흔히 본능으로 표현되는 인간 정신의 가장 근원적인 영역이다. 심리학자들이나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드를 인간이 가진 과도한 소망, 즉 욕망으로 연결시키고는 한다. 반대로 초자아는 도덕, 윤리, 가치관 등 사회가 요구하는 양심에 따라 이드를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개인의 내면화된 모든 제약의 총합으로 표현된다. 흔히 이드와 초자아가 항상 충돌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지만 정치적 갈등이나 종교적 탄압 등 인류 역사를 통해볼 때 초자아 역시 때로는 맹목적이고 잔인하게 분출되기도 하여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이드와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에릭슨은 주장한다.[vi] 사실 개인은 끊임없이 사회와 상호작용을 한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인류를 직접 경험하지 못해서 확신은 없으나 우리가 욕망의 총합이라 일컫는 이드가 순전히 개인의 내면에서 기원한다기 보다는 사회가 그 구성원인 개인에게 부여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가령 물질적 부와 사회적 권력의 추구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욕망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들의 정체가 이드인가 초자아인가 하는 물음이 머리 속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양심의 총합이라 일컫는 초자아는 사회를 통해 개인에게 부여된다고 하지만 이 역시 개인의 내면에서 기원을 두는 경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가령 순수한 사랑의 추구는 사회적으로 고결한 가치로 인식되어 개인에 내면화 된 초자아인가 아니면 개인의 내면에 기원하는 본능이라는 이드 인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나의 중요한 관심사는 이드도 초자아도 아닌 자아이다. 일부 심리학자들에 의해 시소에 비교되기도 하는 인간의 자아는 굳건하기만 하다면 욕망과 양심 사이의 충돌을 완화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그래서 개인과 사회와의 충돌 또한 완화하고 조화를 이루게 하는 매우 중요한 기제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해 자아가 약한 개인은 때로는 이드에 의해 무의식적 본능이 의식을 압도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또한 때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초자아의 억압적 기제만이 자신을 지배하게 놔두기도 하는 것이다. 자아가 건강하고 강하게 형성된 개인들 만이 홍수와 해일과 가뭄이 교차하는 날씨처럼 예측 불가능한 사회 환경 속에서 적절히 이드와 초자아를 조절하여 외부와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이처럼 건강한 자아에는 튼튼한 방어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에릭슨이 안나 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하는데 따르면, 건강한 자아가 방어 기제를 사용하여 불안을 억제하고 본능을 전환시켜 만족감을 성취함으로써 이드와 초자아, 그리고 외부와의 힘의 균형을 달성할 때 비로소 자아는 승리를 얻게 된다고 한다. , 강하고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은 튼튼한 방어 기제가 형성되어 내적 본능과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균형 잡힌 조화로운 인간이 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vii]

학자임과 동시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멘토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어서인지 인간의 본질을 설명해주는 심리학 이론을 접하면 항상 해결책을 고민하게 된다. 그렇다면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년에 걸쳐 학자들 사이에 논의되어 왔을 테니 내가 단번에 대안을 발견한다는 것은 만무하다. 어쩌면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는 자체가 나의 초자아가 조금 강력하게 엄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같기도 하다. 페르소나를 벗고 솔직한 독백을 하기로 결심한 이후 나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서 부여되는 과도한 초자아의 역할을 스스로 견제하기로 마음 먹었다. 적어도 가식적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한 자아 형성을 위한 대안을 추구하는 것은 누군가를 위한 해결책이라고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사회 누구나가 건강한 자아 만들기의 여정을 걷는 다면 갈등과 폭력에 물든 사회가 한 층 더 성숙해 지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또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러다 보니 나의 나이브한 심리학 지식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기도 하였다. 내가 만나온 사람들 중에는 다른 이들에게 공격적 언행을 서슴지 않거나 지나치게 폐쇄적으로 자신을 숨기는 등 흔히 말하는 콤플렉스가 응어리져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행동을 보면 자아가 언제라도 깨질 듯한 얇은 유리막 같이 약해서 방어적 태도가 왜곡된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을 통해서 볼 때 인간이 가진 콤플렉스를 건전한 동기로 치환하거나 승화시킨다면 그것이 자아를 튼튼히 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적이 있다. 콤플렉스가 상대적으로 덜해 보이는 사람들이 스트레스 대응 능력이 뛰어나고 건전한 사회 활동과 창조적인 취미 활동의 균형을 잘 조절하는 사람들과 오버랩되는 것은 아마도 콤플렉스의 극복이 건강한 자아 형성의 지름길이지 싶은 믿음에 확신을 준다.

홀로 우아한 향미를 뿜어내는 피노 누아를 마시면 한편 우아하고 관능적으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왠지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은 못 받는다. 마치 가시 돋친 장미와도 같이 범접할 수 없는 외로운 존재 같은 느낌을 준다. 품종 자체가 고급스럽긴 하지만 생산 과정에서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도로 약하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희소 가치를 높여주는 대신 오히려 매력을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마치 자아가 아주 약해서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채 외롭게 사는 사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와인 전문가들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한 피노 누아의 강인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느낌은 내가 피노 누아에 보내는 연민에 다름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 품종으로 특화된 지역의 기후적 특성을 볼 때 영 억지 주장은 아닌 것 같다. 프랑스의 부르고뉴가 빈티지(vintage)의 특징을 확연히 느끼게 해줄 만큼 변덕스러운 기후인 것과 같이 부르고뉴 밖에서 유일하게 피노 누아로 이름이 난 미국 오리건 주 역시 포도 재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일단 일조량이 적어서 포도를 익게 만들기 힘든데다가 1년에 40인치나 되는 강수량과 서리 역시 포도가 가장 약해지는 봄과 가을에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고 한다. 기후의 패턴 역시 해마다 달라서 포도 재배자 들에게는 여간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viii]

피노 누아가 이처럼 불리한 기후 조건에서 재배된다는 사실은 이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왜 캘리포니아와 같이 기후 조건이 좋은 지역에서 재배되는 피노 누아는 명성을 못 얻고 있는가. 왜 와인메이커들은 우아하고 관능적이라는 피노 누아를 햇빛이 많고 비의 양이 적절하며 해마다 기후 패턴의 변이가 없는 서늘한 지역을 찾아 본격적으로 재배하여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생각을 못했던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와인 마케팅 전략으로 일부 설명될 것이다. 척박한 기후를 가진 지역에서 간만에 좋은 날씨 덕분에 생산된 피노 누아에 고부가가치를 매길 수 있다는 마케팅 전략 말이다. 그러나 비전문적인 경제학적 지식을 적용한다 치더라도 희소 가치만이 자본의 이에 기여하는 요소는 아니라는 점을 볼 때 역시 풀리지 않는 의문인 것이 사실이다. 답은 역시 와인은 인간이 아닌 자연이 빚는 것이라는 프랑스의 와인 철학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정도로 풀리지 않는 의문을 잠시 접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우연히 미국 오리건 주가 무엇으로 유명한가 찾다 보니 피노 누아 와인 외에도 페퍼민트와 헤이즐넛, 그리고 라즈베리, 블랙베리 등 베리류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내 눈길을 끈 것은 크리스마스 트리 역시 오리건 주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다는 사실이다.[ix] 감각에 충실하기 보다는 다소 학구적으로 접했지만 피노 누아에 대한 나의 마음을 열면서 내게 새로운 이미지가 생겨 났다. 단지 겨울 같은 와인이 아니라 겨울 속 원더랜드를 걷는 것과 같이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놀라움의 세계를 선사해 줄 것 같은 이미지 말이다. 내게 차갑게만 느껴지던 와인이 흡사 크리스마스 캐럴과 같은 의미를 전달할 줄은 내가 미처 마음을 열기 전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외롭고 고고한 피노 누아의 이미지는 내가 만들어낸 말 그대로 이미지 일뿐 리얼리티는 아닐 수 있다. 건강한 자아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마음이 닫힌 어떤 타인에게 나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 윈터 원더랜드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되는 길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든다.



[i] MacNeil, K. (2001). The Wine Bible. Workman Publishing. New York.

[ii] MacNeil, K. (2001). The Wine Bible. Workman Publishing. New York.

[iii] MacNeil, K. (2001). The Wine Bible. Workman Publishing. New York.

[iv] MacNeil, K. (2001). The Wine Bible. Workman Publishing. New York.

[v] MacNeil, K. (2001). The Wine Bible. Workman Publishing. New York.

[vi] Erikson, E. H. (1993). Childhood and Society. W. W. Norton & Company.

[vii] Erikson, E. H. (1993). Childhood and Society. W. W. Norton & Company.

[viii] MacNeil, K. (2001). The Wine Bible. Workman Publishing. New York.

[ix] MacNeil, K. (2001). The Wine Bible. Workman Publishing.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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