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13장] 에필로그

 
사한다
와인이 세계관을 변화시켰다고 독백을 다른 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조금은 우려된다. 내가 너무 와인을 미화하거나 과장한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자문한다. 그래 봐야 결국 잔인 와인을 두고 온갖 인간사를 풀어낸 것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와인에 관한 솔직한 독백을 것에 대해 후회가 없다. 독백을 마쳐가는 지금 나의 눈앞이 조금은 트인 같다는 기분 때문이다. 와인을 매개로 인류의 삶에 대해 조금은 배운 같다는 뿌듯함이 생긴다. 내가 독백을 무사히 마칠 있게 된 것에 대해 그리고 배움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 것에 대해 와인 선구자들에게 먼저 고마움을 보낸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초창기에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다. 힘든 환경과 어려운 조건에서 자신의 소신만 믿고 노력했던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후세의 우리가 보다 편한 환경에서 즐거움을 나눌 있게 것이다. 그들이 직접 남긴 혹은 후대의 계승자들이 집필한 책들 덕분에 나는 그들과 너무나도 소중한 대화를 나눌 있었다. 시공간을 초월한 진취적 여정이었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배우고 싶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다 보니 은연 중에 배우는 위치와는 거리에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질문을 하기 보다는 받는 입장이고 사람들은 으레 내가 많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 기대한다. 기대를 받다 보니 실망을 시킬까 두려워 어느덧 사람들의 시선에 맞춰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솔직한 심정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배우는 사람이고 싶다는 거다.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말끔히 떨쳐버리고 싶고 나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쪼르르 달려가 답을 구할 수 있는 멘토를 갖고 싶. 그런데 솔직히 내가 배우고 싶은 진짜 이유는 나의 도전의식이 안일한 관성을 용맹하게 물리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학자의 길에 접어들 때 평생 공부를 해야 하는 직업이라 생각하고 선택을 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한국의 교수 사회는 내가 입고 있는 교수라는 페르소나를 당장이라도 벗어버리고 싶게 만드는 기득권 사회의 구태를 보여준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나도 편안한 삶에 그대로 안주하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는 지금 나는 배우고 싶은 열망에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낀다. 다행이다.

자락의 미소와 추억을
나는 사람들이 와인을 단순하게 즐겼으면 좋겠다. 가식도 허영도 체면도 아닌 힘든 업무를 끝내고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때로는 인생의 동행인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와인 잔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내가 와인을 처음 접했을 전문가들이 풀어낸 현란한 지식에 압도당했던 경험을 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나의 독백은 사람들이 와인이 주는 여유를 통해 스스로를 보듬기를 원했던 것이지 내가 가진 지식을 교만하게 뽐내려는 것이 단연코 아니었다. 만일 나의 의도가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면 내가 반성을 해야 것이다. 나의 독백을 들은 사람들에게 내가 희망하는 행동은 가지이다. 하나는 그들의 흐뭇한 미소이고 하나는 어떤 와인이든 접하게 되었을 나의 독백을, 내가 독백했던 사실만이라도 기억해 주길 바란다. 미소를 짓는 다는 것은 나의 독백이 그들의 가슴에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므로 감동적이다. 기억을 한다는 것은 나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추억이 되었다는 것이라서 운치가 있다.

감사한다
이 세상의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다. 혹은 인터넷 공간 어딘가에서 유연히 부딪힌 이름도 모르는 익명의 와인 블로거들에게도 감사하고 싶다. 학계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인생을 사는 슬기로운 지혜는 나이와 학력을 불문하고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 어느 새 사람을 간판과 명함으로 판단하곤 하는 세태가 되었지만 깨달음을 주는 데는 어떠한 자격증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벌거벗은 본질이 얼마만큼 순수하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나는 나의 단골 주유소에서 일하는 직원으로부터 고객관리의 본질을 배웠다. 내가 다니는 미용실에서 일하는 20대 후반의 헤어 디자이너에게서는 아랫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태도를 배웠다. 나는 로버트 파커도 신뢰하지만 내가 가는 단골 와인 아울렛 매니저의 말도 무척 신뢰가 간다. 배움은 나이가 많고 간판이 좋은 사람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모든 이들로부터 나는 삶의 이치를 배운다. 직접 만나지는 못해도 내 독백을 듣고 와인을 사랑하게 될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도 감사한다. 언젠가는 그들이 내 인생의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주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순수만큼 희망찬 삶의 동력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언젠가 그들이 돋보이는 와인 애호가로 거듭나리라고 믿는다. 언젠가 그들이 독백을 들려줄 때 나는 제일 앞줄에 가서 앉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경청하고 싶다. 그리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12장] 비오디나미 와인의 연금술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에 의한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는 이제껏 나의 호기심이 한번도 미치지 않은 우주와 천상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연금술사들이 추구하던 과학과 영적 세계의 접목과도 흡사 비슷하다. 하지만 내가 비오디나미 와인의 매력에 빠진 이유는 드넓은 우주에서 보면 그야말로 창해일속과 같은 나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 모든 생명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나를 변화시킨 와인이 진정한 연금술사라고 생각한다.


와인 양조학을 공부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중국 와인 산업의 두드러진 약진이다. 흔히 중국의 술 하면 중국의 전통주 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통계에 따르면 와인 소비량에 있어서 세계 5, 생산량은 6위에 올라 있다. 많은 인구 수를 생각하면 소비량이 많다는 것은 얼추 이해가 가지만 중국 내에서 와인을 그리 활발하게 생산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와인은 그들만의 독특한 주조법에 따른 와인이 아닌 포도로 만드는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와인을 말한다. 미국 와인의 주요 수입국 3위에 랭크 될 정도라는 사실에서 중국 내에서의 와인에 대한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아시아 국가 중 와인의 인기가 가장 높고 대중화 되었다는 일본을 앞설 정도다.[i]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서구 사회를 상징하는 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고대 문명이 기원했던 그리스와 이집트에서 신을 숭배하던 의식에서 와인을 사용했다는 고고학적 흔적이 있다. 가령 기원전 5천년 경으로 추정되는 유물인 암포라(amphorae)라는 항아리 안에서 산과 탄닌의 찌꺼기가 발견되었다 사실이다. 와인이 종교적 의식과 개인적 만족을 위해 매우 중요했던 메소포타미아 유역과 나일 유역은 지금의 이라크, 시리아, 이란, 터키 등 중동 지역과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 해당하던 지역 말한다.[ii]
  
와인의 기원이 동양에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와인이 과학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더 신성해 보이고 영적인 세계를 표현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에 와인메이커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바이오다이나믹(biodynamic) 농법은 단순히 화학 비료를 배제하는 차원이 아닌 우주의 원리를 와인 양조에 반영하는 과학이자 또한 철학이다. 와인이 영적인 세계를 반영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 역사 기록에 의해 밝혀졌다. 기원전 8세기 경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 달이 식물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을 남겼다. 심지어는 현대 와인 양조법에 버금가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기도 했다. 포도를 수확해서 주스를 짜내기 전에 진흙으로 만든 병에 담아 건조시킴으로써 당분이 농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알코올이 매우 높아 남아 있는 당분이 다시 발효되지 않는 다는 내용이다. 또한 하늘에서 보내는 신호에 따라 와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헤시오도스는 별 또는 우주의 질서에 따라 작물들을 재배할 것을 가르친 최초의 인물이었다. 관찰되는 현실과 영적인 현실을 연결시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념을 있는 예다.[iii]

중세로 넘어오면서 수도사들에 의해 포도원이 가꾸어지기는 했으나 교회의 금욕주의가 팽배함에 따 와인과 관련한 영적인 세계는 다지 번성하지 못했다. 이어서 17세기에 과학자 뉴턴이 등장하면서 만유인력의 법칙이 발견되었고 유럽이 신세계를 정복해나가면서 농업 혁명이 일어났다. 이 시기 도시와 인구의 성장, 무역의 발전 등 사회 경제적 변화와 중산층의 등장에 따라 와인 생산은 더욱 상업화 되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과 함께 계몽주의와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이에 따라 자연과학이 발달해서 산업혁명의 서막이 올랐으며 프랑스의 포도원들 세속화되 시작했. 19세기에 미국에서 시작된 필록세라로 인해 와인 산업은 동안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치른 후 본격적으로 효율화를 추구하 . 전시의 기술들이 응용되기도 한데다가 파스퇴르에 의해 알코올 발효의 과학적 원리가 발견된 데 힘입 것이. 사실 우리는 근대 과학의 혁명이 우리가 몰랐던 많은 세계를 알게 해주었다고 믿고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일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계를 감각기관이 지각할 수 있는 범위로 좁혀 놓았기 때문이다. 포도나무도 예외는 아니라서 과학기술이 재단할 있는 범주 안에서 판단하다 보니 퇴비를 써서 즉각적인 효과가 관찰이 안되면 화학비료를 쓰는 등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실질적으로는 포도의 건강이 약해져 갔던 것이다. 약해지면 많은 인공적 처치가 행해지는 어찌 보면 악순환의 반복이라 있다.[iv]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의 선각자는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스타이너(Rudolf Steiner)이다. 19세기의 인물로 건축가, 극작가, 교육자, 철학자라는 직업을 동시에 가졌던 그는 처음에는 수학, 물리학, 화학 등 과학을 공부하다가 인문학과 영적인 학문에 심취하여 전공을 바꾸었다. 그의 내면에서 샘솟는 비물리적 세계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독일에서 문학과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당대의 문호였던 괴테를 연구한 전문가가 되었다. 사실 우리는 괴테를 문학가라고 알고 있지만 그의 문학세계는 훨씬 폭넓은 지적 영역을 다룬다. 그의 현상학과 유기과학의 선구적 업적은 스타이너로 하여금 안 보이는 영적 세계와 보이는 물리적 세계를 연결 짓는 영적 과학(spiritual science) 이론을 창시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인지학(anthroposophy)이라고도 불리 우는 스타이너의 영적 과학은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었고 그 중 하나가 바이오다이나믹스였다. 그와 동시대에 생각을 같이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오늘날의 바이오다이나믹 원리가 포도 재배 및 양조에 본격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스타이너의 관점은 지구상에서 자라나는 생명모두 우주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표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화학비료와 제초제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는 포도 재배가 파괴적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하면서 영적인 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v]

스타이너의 영적 과학은 오늘날 바이오다이나믹스에 대한 논의를 더욱 활발히 하였고 니콜라스 졸리(Nicolas Joly)를 필두로 한 적극적 계승자들을 낳았다. 현재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전 세계의 적지 은 와이너리들이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을 적용하여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바이오다이나믹스는 태양과 여러 행성으로 구성된 우주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시각이다. 태양계의 각 구성 요소들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고 지구도 또한 태양계에 영향을 주는 일종의 시너지와 같은 시스템이다. 한 예로 일군의 북유럽 학자들은 지구상에서 핵폭발이 일어나면 대략 100일 후에 태양에서 정확한 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그 메커니즘이 더 명확히 입증되어야겠지만 적어도 지구와 태양이 서로 신호를 주고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만으로도 의미가 상당하다고 하겠다. 문제는 우리가 몇 백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무언가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리적 세계에 영향을 미치리라고 믿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되는 물리적 세계라는 덫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의 힘은 물리적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조직된 에너지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태양은 지구에 다양한 에너지의 파장을 통해 영향을 미치고 우리 역시 태양 또는 별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에너지의 힘에 의해 입자들이 모여서 어떤 물체가 우리의 감각 기관에 들어올 수 있게 해. 지구 전체가 그 기원은 알 수 없는 우주의 파장에 의해 생명을 얻고 살아간다고 . 살아있는 모든 것은 서로 다른 리듬, 진동, 파장에 의해 지탱되기에 물리적 죽음은 특정한 리듬의 부재로 볼 수 있다. 각 행성이 고유한 에너지 언어를 갖고 있다고 보는 연구자들은 최근에 인간이 가 다양한 병의 에너지 지도를 그림으로써 예방의학적 관점에서 획기적인 시도를 하기도 했다. 어떠한 병이 생기는 조건을 만드는 공명(resonance)의 정확한 영역을 진단하는 것은 병이 발병하기 전에 예방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관점이다. 만일 우리가 기형적인 진동이라던가 병의 공명 지도를 발견해낼 수 있다면 병의 위험을 미리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vi]

식물은 발달단계에 따른 개의 기관(organ) 가지고 있다. 뿌리, , , 열매가 그것이다.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은 개의 식물 기관이 다시 개의 요소와 연관이 있고 행성 또는 별의 충동(impulse)이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vii] 뿌리가 자라는 단계는 충동(earth impulse)이고 잎이 자라는 단계는 충동(water impulse) 이며 꽃이 피는 단계는 충동(light impulse), 마지막으로 포도와 같은 매를 맺는 단계는 열 충동(heat impulse)의한 것에 해당. 아직은 바이오다이나믹스를 공부하는 과정이라서 이러한 설명이 쉽사리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구 존재하는 생명체의 라이프 사이클이 일종의 사람 맥박과 같은 행성과 별의 충동에 의해 설명된다는 정도로 이해를 한다. 여기서 충동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메마른 과학적 용어인 자극이라는 표현이 담지 못하는 유기체적인 상호작용을 표현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지구와 행성의 위치 그리고 그 뒤의 별자리와의 관계 하에서 이러한 영향은 명확해지고 조화로진다고 한다. 바이오다이나믹스 연구자들은 화학 비료 제초제 등이 살포되는 등 인위적인 개입을 하는 현대의 농업에 의해 식물 이러한 우주와 천체의 영향을 잘 수용하지 못하게 비판한다. 마치 누군가 아파서 의사소통 능력을 잃게 되는 것과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 대해서는 귀가 열려있어야 하는데 흡사 귀머거리가 되는 것과 같 원리라는 주장이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많은 음식들이 인간에게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설명하기도 한다.[viii]

나는 인간의 감정도 입자운동을 한다고 믿는. 내가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 와인을 마시면서 진작에 느꼈던 바다. 니콜라스 졸리가 말했듯이 우리가 와인을 마시면서 느끼는 아로마와 팔레트는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천상의 세계를 느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천체와 지구가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존재케 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만든다고 할 때 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의 감정이 바로 에너지의 정체라고 생각한다. 와인을 마시며 우리 감정의 입자가 운동을 할 때 바로 긍정적인 에너지가 흐른다고 믿는다. 그렇게 볼 때 와인을 양조하면서 고유의 감정을 담는 다면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와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가령 한국에서는 어떠한 감정을 담아서 만들어야 이제까지 아무도 마셔보지 못한 고유한 와인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 질문에 내가 생각한 답은 바로 정, , , 낙이다. 한국의 정, 한국의 흥, 한국의 한, 그리고 한국의 낙. 이 네 가지 감정은 다른 민족에게는 그다지 흔치 않은 감정의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네 글자 다 한자로 존재하기에 동양의 한자문화권 민족이 공통으로 가진 감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느 민족도 자신들 고유의 감정 차원이라고 공언한 바가 없기에 그 기원이 어찌되었건 나는 이 네 가지를 자랑스럽게 한국인의 정서라고 말하고 싶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국 사회의 모든 인간 관계의 진정성은 바로 정으로 표현되지 않나 생각한다. 부부의 정, 형제의 정, 사제의 정, 친구의 정, 동료의 정.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이 인연을 맺기 때문에 정이 생겨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정을 나눌 운명이 아닌 던가 싶다. 인생의 가장 초기에 처음 뿌리 내리는 인간 관계의 단계로 보이니 포도 나무로 보자면 흙 충동에 의해 뿌리를 내리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많이 느끼는 시기는 젊은 청춘의 시기가 아닌가 한다. 우리 사회가 경제 저성장과 고용 불안의 부을 고스란히 청년들에게 지우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젊은이들은 가능성과 희망을 안고 사는 세대이다. 꿈이 있기에 그들의 좌절은 도약의 계기가 된다. 그래서 마치 물의 충동으로 자라나는 새파란 나뭇잎과 같은 것이다.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가정을 꾸리고 사회 생활을 주도해 가는 중년의 시기가 아닌가 싶다. 한은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가슴의 응어리이다. 분노를 겉으로 표출을 하지 않고 가슴 속에 삭이는 한은 한국인의 색깔을 만들어 온 감정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을 생각해서 온갖 사회의 설움을 참는 가장의 한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견뎌야 했던 민족의 어두운 세월 마찬가지로 애절하다. 이제까지 한이라는 감정 차원 다소 음지에 존재해 왔으나 나는 한국인의 한을 양지로 이끌어내고 싶다. 분노를 가슴에 삭일 줄 아는 너무나도 성숙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분노를 가슴 속에 삭이는 행위는 성숙을 낳고 성숙이 빛을 보기만 한다면 전화위복이 되니 그래서 중년의 시기를 인생의 황금기라고들 표현하기도 한다. 아마도 빛 충동에 의해 꽃을 피우는 시기이리라 본다.

우리 인생에서 노년의 삶은 낙으로 표현 . 인생을 즐긴다는 말은 삶을 관조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낙은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을 의미하는 흥과는 다른 차원으로 넘치는 감정을 억누를 줄 알고 메마른 감정에 잔잔한 파문을 던질 줄 아는 자신에 대한 완벽한 조절 능력과 주변과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 때만이 성취되는 감정 차원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에너지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인생의 가장 완숙한 단계일 것이다. 이러한 완숙의 단계에 접어들어야 열을 흡수하여 포도 열매를 맺는 것이 가능하리라 본다.

다소 억지 비유인지는 몰라도 정, , , 낙이라는 감정의 차원은 결국 사람의 인생 주기에 따라 함께 변동되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인간을 식물에 비유한다는 것이 메타포의 차원을 넘어서 과학으로 받아들이자면 인간을 비하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바이오다이나믹스의 관점에서는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하며 서로가 서로를 존재 하는 관계이다. 우주를 관할하는 법칙의 관점에는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그 어느 생명체도 하찮게 여겨지지 않는다. 실제로 독일의 한 제약회사는 1921년부터 스타이너의 자문을 받아 영적 과학을 적용한 의약품을 개발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장기에 비유되는 특정한 식물의 기관을 치료에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머리에 해당하는 식물의 뿌리는 신경계의 문제를 치료하는 데 쓰이고 잎과 줄기는 심폐기능과 혈액순환을 치료하는 데, 그리고 열매와 꽃은 소화 등 신진대사를 치료하는데 사용되는 식이다.[ix]

나름 그림을 그려서인지 보이지 않는 인간의 감정을 시각화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흔히들 사랑을 사람의 심장 모양을 본 떠서 하트로 표현을 하는데 한국인들의 정은 무엇으로 상징화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였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한은 또한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어떤 대상의 비유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하게 감정을 시각화하는 작업은 상당히 어려웠다. 아마도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쉬운 작업일 수도 있다. 감정을 주제로 한 무수한 대중가요를 들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사를 쏙 빼고 순전히 음파의 파장으로 감정을 표현한다면 다시 딜레마에 빠진다. 아마도 감정은 우리 감각기관으로 인식할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 스타이너가 처음 바이오다이나믹스를 창시했을 때 우리가 감각기관에만 의존함으로 인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오히려 좁아졌다고 한 주장에 나는 십분 동의한다.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물체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생각이 우주만물의 원리에 눈뜨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혹자는 내가 독백을 하는 지금도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 바이오다이나믹스를 접목시키는 것을 지나친 과장 내지 뜬금없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거창한 우주와 천체를 논의하기 때문에 영적 과학이 의미 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않는 세계의 힘에 겸손의 자세로 머리 숙여 감사 있게 되어 다행일 따름이다.




[i] Adams, D. (2010). Introduction to Wine and Winemaking Lesson 1: Introduction.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ii] Waldin, M. (2004). Biodynamic Wines. Octopus Publishing Group: London.

[iii] Waldin, M. (2004). Biodynamic Wines. Octopus Publishing Group: London.

[iv] Waldin, M. (2004). Biodynamic Wines. Octopus Publishing Group: London.

[v] Waldin, M. (2004). Biodynamic Wines. Octopus Publishing Group: London.

[vi] Joly, N. (2008). Biodynamic Wine, Demystified. Wine Appreciation Guild: San Francisco.

[vii] Waldin, M. (2012). Biodynamic Wine-Growing: Theory and Practice. Published by Matthew Waldin. Available through Amazon Digital Services, Inc.

[viii] Joly, N. (2008). Biodynamic Wine, Demystified. Wine Appreciation Guild: San Francisco.

[ix] Waldin, M. (2012). Biodynamic Wine-Growing: Theory and Practice. Published by Matthew Waldin. Available through Amazon Digital Services, Inc.

[11장] 꿀과 꽃 스위트 와인

나는 혼자서는 스위트 와인을 마셔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대부분 여러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음식과 함께 나눠 마셨다. 우리 사회 관계가 스위트 와인이 내뿜는 꿀과 꽃의 공생 관계처럼 바뀌어서 후세에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


한국 사람들은 과실주에 익숙해서 인지 감미가 강한 와인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낮다. 오히려 달콤한 와인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드라이한 와인들과 달리 당도가 높은 스위트 와인도 많이 즐기는 것 같다. 서양식 코스 요리에서도 대부분의 테이블 와인들은 드라이한 와인인데 반해 디저트와 함께하는 와인으로는 스위트 와인을 사용한다. 이러한 양상이 그저 관습에 기인한 것인지는 문화인류학적으로 공부를 해봐야 알겠지만 식사의 마무리를 달콤하고 산뜻하게 끝내는 것이 여하튼 자연스러워 보이기는 한다. 스위트 와인을 만드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인위적으로 알코올을 강화시켜 발효를 중단시킴으로써 잔당을 남기는 방법. 와인의 알코올 농도가 15% 정도에 이르게 되면 효모의 활동이 중단되므로 이상 발효가 진행되지 않는다. 따라서 발효가 끝나기 전 인위적으로 알코올을 강화하면 채 발효가 되지 않은 당 성분이 남게 되어 스위트 와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대표적인 와인은 포르투갈의 포트 와인이고, 그보다는 덜 대중화 되었지만 프랑스의 뱅 두 나뛰렐(Vin Doux Naturel)이라 불리는 와인도 매력적인 스위트 와인이다. 주로 머스캣(muscat) 품종을 이용하여 프랑스 남부의 론이나 랑그독에서 만들어지곤 한다.[i] 이러한 주정강화 와인은 알코올 농도가 거의 20%를 웃돌기 때문에 적당한 양만 시음해야 한다. 달콤한 맛이 알코올의 독하고 쓴맛을 가리고 있어서 자칫 주량을 조절 못하면 쉽게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스위트 와인 제조 방식은 포도가 가진 당을 농축시키는 방법이다. 포도를 건조시켜서 당을 농축해 양조하는 방식이 이에 해당한다. 늦게 수확해서 나무에 열려 있는 동안 건조시키는 방법도 있고 수확한 포도를 건조한 환경에서 널어 놓고 말리는 방법도 있다. 이탈리아의 레치오토 와인이 건조 방식으로 만드는 스위트 와인이다. 귀부 와인 역시 당을 농축시켜 만드는 스위트 와인에 해당된다. 속칭 귀한 곰팡이라고 불리 우는 보트라이티스 시네리아에 약한 포도 품종들의 경우 곰팡이에 전염이 되면 껍질이 약해져서 과육으로부터 수분이 증발되어 쪼글거리면서 당과 산이 농축된다. 보르도 쏘테른 지방의 세미용이 대표적인 귀부와인이고 그 밖에 헝가리 토카이와 독일의 베렌아우스레제(Beerenauslese)나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rockenberenauslese)가 있다. 반면 캐나다와 독일, 오스트리아에서는 포도 안의 수분이 얼게 되는 겨울에 수확을 해서 언 상태에서 껍질을 벗겨 얼음 조각을 제거해냄으로써 당이 농축된 상태에서 만드는 아이스 와인을 생산하기도 한다. 이처럼 건조나 냉동을 통해 당을 농축시킨 후 발효를 중단하면 잔당이 많이 남아 달콤한 와인이 만들어진다.[ii]

스위트 와인의 양조법을 이야기 하자니 자연스레 와인과 함께하는 식사 문화가 궁금해 졌다. 인간의 음식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추적한 마틴 존스(Martin Jones)<Feast>라는 책에서는 레스토랑의 역사적 배경을 읽을 수 있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는 무역이나 여행을 하던 사람들이 흔히 방문한 지역의 여관이나 음식을 먹는 공공장소에서 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제공하는 주인이 앉은 큰 테이블에서 정해진 시간에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테이블을 따블르 도뜨(table d’hôte)라고 불렀다고 한다. 큰 항아리에 담긴 음식을 나눠 먹었으며 만일 식사시간에 늦거나 먹는 속도가 너무 느리면 충분한 음식을 못 먹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코스 메뉴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지만 당시의 따블르 도뜨는 군주제도의 전통이 지역의 식사장소까지 이어져 내려온 영향 때문이었다. 군주제에서의 식사예법은 왕이 테이블의 끝에 앉아 일반 대중들이 그가 먹는 것을 지켜보게끔 하는 전통이 있었다. 비단 왕 뿐만이 아니라 귀족과 주교들도 마찬가지의 관습을 행하였다. 이후 산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여행을 하는 계급은 이 같은 공공장소의 맛없는 음식에 불평을 하곤 했는데 유일하게 예외적인 곳이 바로 프랑스 파리였다.[iii]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 이후 파리 레스토랑의 가장 큰 특징은 따블르 도뜨의 중요성이 줄어들거나 거의 미미해졌다는 사실이다. 분리된 테이블들과 혼자 앉을 수 있는 좌석들이 생겨나기도 했고 혼자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신문이나 다른 인쇄 매체를 즐기며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알파 매일(alpha male), 즉 우두머리 남성이 앉던 매우 화려했던 자리를 대체한 것은 거울과 촛불이었다. 손님들을 둘러싼 거대한 거울과 각 테이블에 타오르던 촛불이 레스토랑이 지출하는 주요 경비였다고 한다. 또 다른 두드러진 점은 레스토랑에 여성들이 손님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남성들은 뻔뻔하다고 비난을 하기도 하였고 유쾌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실 레스토랑 보다 먼저 생겨났던 17세기 유럽의 커피 하우스 혹은 카페는 레스토랑보다 일찍 다양한 지적 교류의 장소가 되어 왔다. 비즈니스가 행해지기도 하고 문학, 의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강의가 열리기도 했다.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고 실험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한 예로 영국의 유명 커피 하우스에서는 과학자 뉴턴이 돌고래 해부를 수행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토론과 논쟁, 민주주의, 급진적 정치의 산실이 되었고 프랑스 혁명 전야에 시민들을 무장시킨 곳도 바로 프랑스의 카페였다. 차를 마시던 곳과 식사를 하던 곳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카페와 레스토랑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문화를 만들어가던 공공장소라는 면에서 오버랩 된다.[iv]

마틴 존스의 문제의식은 사실 인간이 사회적 인간인지 아니면 생물학적 유기체인지를 묻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음식을 나눠먹는 행위를 하는데 단순히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는 행위도 함께 하는 등 문화를 창출했다는 관점이 전자이다. 반면 후자와 같이 인간이 음식을 먹는 것은 생물학적인 본능을 유지하기 위한 순전히 동물적 욕구에 기인한다는 관점도 존재한다.[v] 인간이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별다르게 생각해오지 않았던 나는 존스의 책을 읽으면서 역사에 따른 다양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군주제에서는 군주 또는 권력을 가진 남성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식사 문화였고,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에 따라 점차 수평적 식사 문화로 바뀌어 간 것이다. 과거에는 공동의 테이블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제공되는 품질이 안 좋은 음식을 일컬어 칭했던 따블르 도뜨가 오늘날에는 레스토랑에서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코스 요리를 뜻하는 의미로 변천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문화라는 것이 사회의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일종의 마르크시즘적 관점을 수용하지 않는다 하여도 적어도 사회 권력의 역학관계가 투영되는 것이라는 시각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이 식사가 단순히 생물학적인 욕구를 유지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경제와 정치와 문화라는, 즉 인간이 창출한 제도가 종합적으로 반영된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나는 인간은 사회적 인간이라는 관점에 한 표를 던지겠다.

솔직히 식사 문화만큼 사회와 시대를 정확히 반영하는 인간의 행위는 없으리라 본다. 특히 가족이나 친족집단과 같은 1 집단을 벗어나서 사회적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과 함께하는 식사 문화가 본격적으로 우리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하지 않을까 싶다.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간의 경제 활동은 배고픔이라는 동물적 욕구를 채우는 것은 물론 식사 모임을 통해 대화를 매개로 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교양 있는 본능 채우기의 활동이 아닌가 싶다. 중국 고사에서도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린다는 함포고복이 태평성대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음식과 정신적 여유가 한 국가의 경제지표임을 진작부터 알 수 있었다. 가계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엥겔지수라고 하고 일반적으로 고소득 가계일수록 엥겔지수가 낮다고 보아서 선진국인지 후진국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한 기준이 되고 있다. 선진국일수록 엥겔지수가 낮고 후진국일수록 높다는 것이 기본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식료품비를 떠나서 외식비를 따져보면 그 반대의 현상을 보여준다. 가령 엥겔지수가 가장 낮은 선진국인 미국을 예로 지난 백 년 동안의 가계소비 경향을 따져보면 가정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는 점차 낮아진 반면 외식을 하는 경우는 반대로 높아지는 양상을 보여준다. 아울러 미국의 부유층과 빈곤층 가계지출은 식료품비보다 주류와 외식 비용에서 더 큰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유층일수록 주류와 외식에 지출하는 비용이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vi] 문화적 차이를 반영은 해야겠지만 외식비의 지출이 많은 사회가 더 부유하다고 볼 수 있고 외식을 적게 하는 경우에는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외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마틴 존스나 여타 인류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음식과 식사 문화를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하는 연구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면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식사 문화가 후대에 의해 어떻게 평가를 받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사실 굳이 식사 문화의 역사와 식사 관련 개념의 어원을 따질 필요도 없이 나는 한 잔의 스위트 와인이 주는 유쾌함과 같이 식사를 즐겁게 마쳤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에린 마이어(Erin Meyer)가 쓴 <Culture Map>이라는 책은 복숭아 문화와 코코넛 문화라는 재미있는 구분을 한다. 미국과 브라질을 대표적인 복숭아 문화로 꼽으면서 설명하길, 사람들이 처음 만나서 나누는 친절함이 절대 신뢰나 우정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미국인들은 어려서부터 항상 처음 본 사람에게 미소 짓도록 교육받았을 뿐 겉으로 보기에 친숙해 보이는 어느 정도의 상호작용의 시간이 지나면 복숭아의 딱딱한 씨처럼 자신을 보호하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코코넛 문화는 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 처음 만나서 서로 웃지도 않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에는 코코넛 껍질처럼 매우 딱딱해서 힘들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따뜻하고 친근해 진다는 것이다. 관계를 맺는 매우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관계가 형성되면 오래 지속된다는 폴란드,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숭아 문화는 업무를 기반으로 신뢰관계를 형성하고 코코넛 문화는 관계를 기반으로 신뢰를 형성하기에 후자의 경우 특히 음식을 나눠 먹는 식사 모임이나 회식이 신뢰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vii] 내가 판단하기에 한국 사회는 복숭아 문화보다 코코넛 문화에 가깝다고 보인다. 중요한 의사결정에서부터 잡다한 수다에 이르기까지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함께 음식을 나눠먹으면서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문제는 과연 사회인들과 함께 하는 식사 모임, 특히 직장 동료나 상사와 함께하는 회식 자리가 유쾌하기만 하던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만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식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단 식사 시간을 즐겁게 만드는 대화 소재의 빈곤 때문이다. 때로는 회사 업무의 연장으로 생각될 정도로 업무 관련 내용만을 이야기 하는, 그래서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한국에서 속된 말로 뒷담화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가십거리를 이야기 한다. 그래도 조금 나은 경우는 정치에 관한 대화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고 주변에서 들은 회식 자리 뒷얘기에 따르면 이 세 가지를 제외하고 다른 소재의 내용으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회식 자리는 매우 드물어 보인다. 그만큼 서로 경쟁을 하며 허점을 보이면 안 되는 각박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로에게 마음을 열거나 긍정적인 감정의 교류를 나누는 대화의 기회는 매우 희박한 것이 현실이다. 폭탄주와 같은 강한 알코올에 의지하는 것도 이처럼 닫힌 식사 문화의 이면이 아닐까 싶다. 회식 자리가 즐겁고 유쾌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독서량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과도 연관된다. 나는 지식을 쌓기 위해 독서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애써 암기를 하지 않는 한 어차피 책장을 덮는 순간 내 기억 속에 남는 책의 내용은 많지 않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가상의 시공간에서 책을 쓴 저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데 가치를 둔다. 그러한 가상의 대화를 통해 때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기쁨과 슬픔을 느끼기도 하는 등 감정을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독서를 하면 내가 저자와 나눈 감성적인 대화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고 그것을 매개로 그들과도 유쾌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나는 사회인들이 회식 자리에서 앙상한 대화를 나누는 첫 번째 이유를 독서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감정의 교류를 매개하고 촉진시키는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회식 자리가 유쾌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프랑스 혁명 이전의 따블르 도뜨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대부분 조직이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그러한 수직적 문화가 회식 자리까지 침범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사장 혹은 부장과 같은 집단의 우두머리를 정점으로 배열해 앉아 마치 따블르 도뜨의 알파 매일에 머리를 조아리는 권위적 식사 문화가 일상화 되어 있다. 사실 식사 자리에서의 예의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 사회도 예전부터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식들이나 아랫사람에 대한 예절 교육을 주로 했던 기회가 주로 식사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식사를 자식에게 예의를 가르치는 중요한 기회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윗사람이 말이 아닌 몸소 보여주는 행동을 통해 예의범절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의라는 것은 윗사람의 권위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이다. 아랫사람의 윗사람에 대한 배려도 예의지만 반대로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 역시 너무나 소중한 예의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회식 문화를 고찰해 보면 우리는 항상 따블르 도뜨의 권위에 눌려 사는 것만 같아 아쉽다.

나는 스위트 와인 중 프랑스 남부에서 생산되는 뱅 두 나뛰렐의 매력에 한 동안 빠져 있었다. 머스 종으로 만든 스위트 와인답게 달콤한 꿀 향기 뿐 아니라 매우 화사한 꽃 향기가 피어 올랐던 것을 경험했다. 꽃이 꿀을 생산하고 꿀은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며 벌과 나비는 꽃가루를 교배하여 또 다른 꽃의 생명을 낳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아름다운 순환적 생태계이다. 우리의 식사 문화가 우리 사회의 인간 관계를 보여준다고 한다면 나는 이처럼 꿀과 꽃의 공생 관계가 되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즐거운 대화가 오고 가고 서로를 배려하는 예의를 갖춘 식사 문화라면 후세의 역사가들이 21세기의 식사 문화를 자랑스러운 문화 유산이라고 생각하며 자부심 속에 기록하지 않을까 싶다.




[i] Wine & Spirit Education Trust (2014). Wines and Spirits: Looking behind the Label.

[ii] Wine & Spirit Education Trust (2014). Wines and Spirits: Looking behind the Label.

[iii] Jones, M. (2007). Feast: Why Humans Share Food.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iv] Jones, M. (2007). Feast: Why Humans Share Food.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v] Jones, M. (2007). Feast: Why Humans Share Food.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vi] Thompson, D. (2013). “Cheap Eats: How America Spends Money on Food,” The Atlantic (March 8).

[vii] Meyer, E. (2014). The Culture Map: Breaking through the Invisible Boundaries of Global Business. Pacific Affairs: New Y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