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5장] 랑그독과 눈물

아름다운 것이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것이 아름다운 것. 원초적 자연스러움으로 다가온 랑그독 와인이 내게 준 교훈이다. 나는 새로운 희망에 설레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머리 남프랑스의 이미지는 따스한 햇살 아래 해바라기가 흐드러지게 들판이 끝없이 펼쳐진 전원이다. 아마도 아비뇽에 오랜 동안 머물렀던 고흐의 그림 때문이지 싶기도 하고 프로방스를 중심으로 영화나 사진 속에 흔하게 상업화된 남프랑스의 풍경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아름다운 시각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신 남불 와인, 특히 랑그독(Languedoc) 지방 와인들은 하나같이 소박하고 야생적인 자연스러움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세련됨은 떨어지지만 자연의 성격을 그대로 와인에 담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랑그독에 관한 아무런 정보와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와인세계의 중심에 있는 보르도나 부르고뉴와 달리 랑그독 와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정보가 많지 않거니와 상대적으로 유명세가 덜 해서인지 확고한 스테레오 타입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와인을 접할 수 있었고, 나의 감각기관에 입력된 정보가 그야말로 내가 랑그독 와인에 대해 가지게 된 솔직하고 정확한 느낌이라 할 수 있다.

캐런 맥닐(Karen MacNeil) 저술한 <와인 바이블>에서는 랑그독 지방 사실 면적으로 따지면 프랑스 내에서 가장 넓은 포도재배 면적을 자랑한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시장성이 떨어졌던 것은 싸구려 벌크 와인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런 것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 프랑스 병사들에게 제공되었던 값싼 와인이 실제로 랑그독으로부터 왔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몇 몇 와이너리를 중심으로 한 와인 비즈니스의 혁신이 있기 전까지는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와인에서 볼 수 있는 개성 있는 성격의 와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로소 1990년에 이르러 랑그독 와인들은 변신을 하였고, 지금은 론(Rhône) 지방과 대등하게 프랑스 남부를 대표하는 고급 와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랑그독 지방은 지중해를 접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이 펼쳐져 스페인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지중해성 기후와 자연환경의 특징을 보여줄 뿐 아니라, 투우와 같은 황소 싸움을 즐기는 등 문화 역시 스페인과 혼합된 성격을 띄고 있다. 대표적인 레드 와인 품종 역시 지중해 품종으로 스페인에서는 가르나차로 불리기도 하는 그르나슈(grenache)이고, 론 지방에서도 많이 재배되는 시라(syrah)와 무르베드르(mourvedre), 그리고 까리냥(carignan) 등이 주로 재배되곤 한다. 물론 보르도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등도 최근에는 재배가 되고 있지만 랑그독의 얼굴은 흔히 GSM이라는 약자로 표기되는 지중해 품종들이다.[i]

선입견 없이 랑그독 와인을 접한 후 느낀 야생적 자연스러움에 매력을 느껴 와이너리에 관한 정보를 찾게 되었다. 랑그독을 대표하는 유명 와이너리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특징은 자연주의로 요약된다. 랑그독의 떼루아가 보여주는 특징들을 최대한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와인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지방에서 생산된 와인들의 시음노트를 보면 유난히 흙, 잔디, 이끼 등 땅 위의 요소들 느낌을 주는 얼씨(earthy)하다는 표현이 많다. 또한 라임, 로즈마리 등 허브 향이 느껴진다는 평가도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포도 재배와 양조에 있어서도 유기농법을 많이 써서 인공적인 화학비료를 철저히 배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와인의 품질을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로 피니쉬(finish) 혹은 애프터테이스트(aftertaste)라는 것이 있다. 목젖을 넘어간 후 남는 느낌이 얼마나 지속이 되느냐를 말한다. 피니쉬가 강렬하고 길수록 좋은 와인으로 평가 받는 게 일반적인데, 프랑스에서는 이를 꼬달리(caudalie)라는 시간 단위로 측정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대략 1꼬달리를 1초로 간주하며, 좋은 와인일 경우 7~8초 정도 피니쉬가 지속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유명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는 자신이 마셔본 와인 중에 피니쉬가 30꼬달리에 달했던 적도 있었다고 하고, 어떤 와인 애호가는 와인을 마신 다음 날까지 피니쉬가 지속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사실 피니쉬를 좁은 의미의 감각적 느낌으로 파악하면 7~8초를 넘기 힘들지만 인간의 장기기억 속으로 넘어온 느낌으로까지 확장해서 보면 정말 하루 혹은 며칠 이상 지속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한 번은 캐러멜 향이 강렬한 미국 와인을 마셔본 적이 있는데 그 피니쉬가 며칠 동안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마치 와인 잔이 내 코 바로 아래에서 특유의 향을 계속해서 풍기는 느낌이랄까. 랑그독 지방 자연주의 와인은 이 피니쉬의 차원에서 특히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특정한 향이 강렬해서 피니쉬가 지속되었다기 보다는 특유의 야생적 자연스러움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내 마음을 한 동안 떠나지 않았다.

제임스 엘킨스(James Elkins)라는 미술사학자가 쓴 <그림과 눈물>이라는 책에는 <그림 앞에서 울어본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한 오륙 년 전 쯤 대형 서점에서 책들을 훑어보다가 우연히 발견, 제목과 부제가 나의 시선을 확 사로잡는 바람에 냅다 사버린 책이었다. 당시 그림으로부터 큰 감동을 받아 본 기억이 없던 나는, 그래서 대학 때 전공이었던 미술사를 공부하는 것도 포기한 나였기에 주저 없이 그 책에 손이 가고 말았다. 과연 진짜로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려본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있다면 어떠한 이유 때문에 그렇게 감동을 받았단 말인가 하는 온갖 생각들이 교차했던 걸 지금도 기억한다. 왜 사람들은 그림을 보고는 감동받아 눈물 흘리지 않는 걸까. 이 질문을 던지며 엘킨스는 신문에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찾는 광고를 내었는데 뜻밖에도 자신 앞으로 그러한 경험이 있었다고 얘기하는 400여통의 편지가 도착했다고 한다. 그렇게 받은 편지들을 바탕으로 그림의 어떤 요인들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가를 인문학적으로 유추해본 책이다.[ii] 명확히 손에 잡히는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책이라 다소 실망스럽긴 했으나 그래도 책의 여기저기서 그림에 대해 내가 가진 생각을 충동질하는 역할은 충분히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화가들이 있었던가를 끊임없이 자문하였는데, 그저 막연히 마티스, 세잔느, 고흐, 고갱, 피카소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눈길이 간다는 걸 느껴올 뿐 그야말로 매우 좋아하는 화가는 없던 나에게 어렴풋이 떠오르는 화가가 한 명 있었다. 미국 여류 화가인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미국 워싱턴 DC 있는 미술관에서 오키프 전을 했을 때 우연히 들러 관람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뉴욕을 묘사한 그림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기억이 번득 떠올랐다.

사실 오키프의 그림 대부분은 꽃과 같은 자연의 요소를 현미경 들여다보듯 그린 점이 특징이다. 다소 오키프 그림의 오브제에서 벗어나 있던 뉴욕 그림이 내 눈길을 사로잡은 이유는 아마도 과거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내려다 보며 내가 받았던 뉴욕의 느낌을 그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당시 높은 빌딩에서 뉴욕을 내려다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언젠가 내가 뉴욕을 그린다면 아마도 회색 바탕에 노란 색 점들로 표현을 할 것 같다고. 일종의 지각적 추상 작용인데 당시 내가 받은 뉴욕의 느낌은 옐로우 캡들이 점점이 움직이는 것이 도드라져 보였기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더군다나 그림 옆 갤러리 벽에 쓰여 있던 오키프가 했던 말, “어느 누구도 뉴욕을 있는 그대로 그릴 수는 없다. 단지 느껴지는 대로 그릴 뿐이다라는 말이 어쩜 그리도 정확히 나의 마음을 표현해 주었는지 내 뇌리 속을 한 동안 떠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최근 늦깎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아마추어 화가의 길을 가게 된 지금, 오키프의 말은 나에겐 일종의 성경 구절 같은 의미로 남아있다. 때때로 오키프가 했던 말인지 내가 지어낸 말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 말은 내 뼛속까지 침투해 있다고 할 정도다. 전적으로 내 기호일 따름 평가절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선지 나는 극사실주의 그림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가 자신의 느낌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작가의 고유한 느낌과 해석을 담은 그림. 그래서 건강한 생명력이 부여된 살아있는 그림. 아마도 내가 그림을 더 좋아하게 되면 그렇게 살아있는 그림을 만났을 때 눈물을 펑펑 흘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가 오키프 그림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된 이유를 공감으로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러고 보니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혹은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 경험은 다들 갖고 있으리라 본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경우에도 결국 공감이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공감이 전제되어야 감정이입이 발생하고 창조된 허구가 현실로 느껴지면서 감정이 자극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영화, 드라마, 음악 등의 장르가 그림과 대비되는 점은 전자의 경우 스토리가 있다는 것이고, 후자는 기호와 상징만을 통해 어필한다는 점이다. 순전히 평면적인 시각 매체인 그림은 그 자체로 감정의 기복을 유도할 수 있는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담기 힘들다. 물론 평면적 프레임 안에서 일종의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기도 하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그림도 있으나 그 이야기 구조의 존재 때문에 감동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된다. 그림과 같이 기호와 상징을 통해 전달되는 시각적 정보는 결국 눈을 통해 우리 뇌에 전달이 될 터인데 눈물샘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 하기도 하다. 하지만 엘킨스의 책에서도 제시하듯 세상에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그림을 앞에 두고 울어본 경험이 있다는 건데 그림의 무엇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 것인지는 두고두고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엘킨스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들에 따르면, 정체를 알 수는 없으나 그림이 주는 아름다움을 은연중 경험했을 때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하지만 엘킨스는 주장한다. 그림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결국 아무 느낌도 없다는 표현에 다름 아니라고. 그림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원래 아름다운 것이기 마련이고, 아름답게 만드는 캐릭터가 부족할 때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평한다는 것이다.[iii] 나는 이 주장에 십분 공감한다. 방송 요리 프로그램 출연진들이 음식을 맛보고 피해야 하는 코멘트가 바로 맛있다는 평이라는 것과 똑같은 논리다. 얼마나 특징과 개성이 없으면, 다시 말해 요리에 캐릭터가 없기에 그저 맛있다라는 표현으로 일관할 수 밖에 없는 거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아름답다는 표현은 그저 기가 막히게 감동적인 그림 앞에서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일종의 감탄사 일수도 있겠다고 이해를 한다. 그 경우에는 그림의 미가 감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습관적으로 아름답다는 표현을 할 따름이다. 난 아직까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적인 아름다움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인지 아름다움 자체가 감정을 북받치게 만든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도대체 아름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동의조차 이루지 못한 것 같다는 게 솔직한 내 생각이다.

몇 해 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동안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림이 좋아 취미로 활동하는 아마추어 화가들의 커뮤니티에 잠깐 결합한 적이 있었는데, 역시 미를 추구하는 화가들 이어선지 한결같이 그림을 아름답게 표현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한번은 내가 깡마른 늙은 배의 선원을 그리고자 했더니 다들 의아해 했다. 그들의 일관된 반응은 대상이 너무 아름답지가 않다는 것. 나름 개인전도 치른 지금만 같아도 내 주관대로 밀어붙겠지만 막 그림의 걸음마를 배우던 당시에는 주위의 그러한 반응에 자신을 잃어버렸. 나는 속으로 깡마른 늙은 선원의 그림을 잘 표현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 그 자체가 그림이 추구하는 미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줏대가 없어서인지 결국 그 그림을 전시회에 걸지는 못했다. 그리고 한 동안 도대체 그림이 추구하는 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기억이 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심리치료가인 엘런 싱크먼(Ellen Sinkman) <미의 심리학>에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 욕구는 인류의 태초부터 존재해 왔고 때로는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 동기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왜곡된 미의 추구는 유아기적 발달과정의 결함이나 그에 기반을 둔 자기애적 성격장애의 결과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외모를 확인함으로써 정체성을 형성하기에 예로부터 거울이 자아와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찌 보면 인간이 아주 어렸을 때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엄마인데 눈빛이나 표정 등으로 자신에 대해 충분히 확인 받았다고 느끼지 못할 때 결함이 생긴다고 한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자기애적 성격장애가 생기게 되면 외모에 집착하게 되고 성형이라든가 몸의 치장에 지나친 열정을 쏟아 붓는 다는 것이다. 자기애적 장애라는 것은 흔히 말하는 나르시시즘에 기반하여 자신의 외모나 능력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 이에 대한 주변의 인정을 끊임없이 갈구 한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이 같은 주관적 자기인식과 객관적 인식의 괴리를 못 참아 하여 스스로에게 폭력적이 되기도 하고 왜곡되게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된다는 설명이다.[iv]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 자기애와 미라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일화는 나르시시즘의 어원이 되기도 했던 나르키소스(Narcissus) 이야기가 대표적으로 인용되곤 하지만 나는 싱크먼의 저서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인 피그말리온(Pygmalion) 일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평소 여성을 혐오하던 피그말리온 이라는 조각가가 아름다운 여인상을 조각하여 갈라테이아(Galateia)라고 이름 붙였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감명을 받아 조각상에 생명을 부여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나르키소스 일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나르키소스와 피그말리온 둘 다 미를 추구했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전자의 경우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한 반면 후자는 생명력이 부여된 자신의 창조물과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의 전문가는 아니라서 싱크먼의 논지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기에 피그말리온과 나르키소스의 비교 자체가 성립되는지 확신이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다소 유치할 수도 있는 도식적 비교법을 적용하자면 나르키소스는 피그말리온이 가지고 있었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 창조력, 그리고 창조물에 대한 애정 등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물에 비친 자신의 외모를 아름다움의 극한으로 보고 그 외모가 자신의 모습인 것을 확인한 뒤 비관적 자학을 했던 데서 우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극복되지 못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싱크먼이 언급 한데로 물이 일반적으로 어머니를 상징하는 그리스 신화의 코드에서 유추할 수 있는 논리이다.[v]

그러나 피그말리온도 자신으로부터 타자화될 경우 언제나 환영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자신을 갈라테이아처럼 아름답게 탄생시켜주는 피그말리온을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찾는 경우 왜곡된 미의 추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외모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때로는 무분별한 뷰티 제품의 소비로 혹은 타고난 생김새를 변형하는 성형의술에의 지나친 의존을 낳게 되는 것이다. 물론 현대 의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선천적 신체장애나 사고로 인한 후천적 기형 등을 치료해주는 성형의술의 발전에 대해서는 더없이 감사한다. 또한 미용 성형일지라도 수술 자신 외모에 대한 자신감 회복에 따른 여러 부수적 효과를 경험했다면 역시 현대 의술에 고마움을 돌려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미용 성형의 동기가 외모에 대한 주위 시선에 집착하는 것과 그에 따라 자신을 갈라테이아로 탄생시켜줄 피그말리온을 찾아 성형의를 찾아간 것이라면 그의 성형에 대한 욕구는 멈출 없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인간은 어차피 노화하게 되어 있고 인생의 정점에서 경험한 미가 평생 동안 유지되기는 불가능할 터인데 자신의 외모에 대한 집착과 그에 대한 주변의 인정, 그리고 끊임없는 피그말리온의 환상이 일종의 성형 중독과 같은 현상을 발생시킬 수도 있음을 우려하는 거다.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저술한 <미의 역사>에서는 추함이 어떻게 아름답게 표상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대의 유물 유적에 관한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미의 기준이라는 것은 국가와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왔음을 읽을 수 있다. 한 때 아름답다고 표현된 존재도 지금의 시각에서는 기괴해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 반대의 경우 역시 빈번히 경험하기도 한다.[vi] 싱크먼 역시 아름다움의 정체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개탄하며 나름 미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추함으로부터 접근해 보기도 한다.[vii]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체험을 통해 터득한 철학이 있다면 극단은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같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가까이 붙어 있다는 거다. 지금 미를 논하는 맥락에서 이야기 하자면 극에 해당하는 추함은 미의 가장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추함이 일종의 콤플렉스가 되고 그것이 미를 추구하는 원동력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다만 미를 창조하는 피그말리온을 밖에서 찾지 말고 내면에 심어 스스로가 자신을 갈라테이아로 재창조하고자 하는 열정 있다면 자신의 본연의 모습에 기반한 건강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정체성을 개성있게 드러내는 자연스러움의 미학이라고 있겠다. 그렇게 성취된 아름다움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도 감동시킬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울 것이 자명하다.

아름다운 것이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것이 아름다운 것. 인간 사회에서 미의 구현체라고 일컬어지는 그림을 그리며 나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에 대해 탐문하였다. 랑그독 와인을 마시면서 그리고 와인의 벌거벗은 자연스러움을 느끼면서 나름 결론을 얻었다. 1980년대 혁신이 일어나기 이전 랑그독 와인이 주목을 받았던 이유바로 캐릭터가 없었다는 점이다. 마치 영화나 연극 무대에서 배우가 표현해야 하는 인물의 캐릭터가 드러나지 않을 경우 극중에서 인물의 존재가치는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랑그독의 노력이 보르도나 부르고뉴의 와인을 이상형으로 하여 어떤 정형화된 와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려 했다면 오늘 날의 전성기는 꿈에도 꿨을 것이다. 랑그독의 진정한 혁신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와인에 담아서 솔직하게 정체성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정신이 캐릭터가 제대로 살아있는 주목 받는 와인으로 재탄생 하게끔 했다고 본다. 피니쉬로 일컬어지는 와인의 감동이 한동안 지속되는 경험을 통해 나는 랑그독 와인이 원초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캔버스 앞에 다시 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는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며칠이고 지속되는 긴 피니쉬를 경험하게 하는 그림을 죽기 전에 한 번은 그려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i] MacNeil, K. (2001). The Wine Bible. Workman Publishing: New York.

[ii] Elkins, J. (2004). Pictures and Tears: A History of People Who Have Cried in Front of Paintings. Routledge.

[iii] Elkins, J. (2004). Pictures and Tears: A History of People Who Have Cried in Front of Paintings. Routledge.

[iv] Sinkman, E. (2014). The Psychology of Beauty: Creation of a Beautiful Self.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v] Sinkman, E. (2014). The Psychology of Beauty: Creation of a Beautiful Self.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vi] Eco, U. (2010). History of Beauty. Rizzoli: Italy.

[vii] Sinkman, E. (2014). The Psychology of Beauty: Creation of a Beautiful Self.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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