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11장] 꿀과 꽃 스위트 와인

나는 혼자서는 스위트 와인을 마셔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대부분 여러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음식과 함께 나눠 마셨다. 우리 사회 관계가 스위트 와인이 내뿜는 꿀과 꽃의 공생 관계처럼 바뀌어서 후세에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


한국 사람들은 과실주에 익숙해서 인지 감미가 강한 와인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낮다. 오히려 달콤한 와인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드라이한 와인들과 달리 당도가 높은 스위트 와인도 많이 즐기는 것 같다. 서양식 코스 요리에서도 대부분의 테이블 와인들은 드라이한 와인인데 반해 디저트와 함께하는 와인으로는 스위트 와인을 사용한다. 이러한 양상이 그저 관습에 기인한 것인지는 문화인류학적으로 공부를 해봐야 알겠지만 식사의 마무리를 달콤하고 산뜻하게 끝내는 것이 여하튼 자연스러워 보이기는 한다. 스위트 와인을 만드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인위적으로 알코올을 강화시켜 발효를 중단시킴으로써 잔당을 남기는 방법. 와인의 알코올 농도가 15% 정도에 이르게 되면 효모의 활동이 중단되므로 이상 발효가 진행되지 않는다. 따라서 발효가 끝나기 전 인위적으로 알코올을 강화하면 채 발효가 되지 않은 당 성분이 남게 되어 스위트 와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대표적인 와인은 포르투갈의 포트 와인이고, 그보다는 덜 대중화 되었지만 프랑스의 뱅 두 나뛰렐(Vin Doux Naturel)이라 불리는 와인도 매력적인 스위트 와인이다. 주로 머스캣(muscat) 품종을 이용하여 프랑스 남부의 론이나 랑그독에서 만들어지곤 한다.[i] 이러한 주정강화 와인은 알코올 농도가 거의 20%를 웃돌기 때문에 적당한 양만 시음해야 한다. 달콤한 맛이 알코올의 독하고 쓴맛을 가리고 있어서 자칫 주량을 조절 못하면 쉽게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스위트 와인 제조 방식은 포도가 가진 당을 농축시키는 방법이다. 포도를 건조시켜서 당을 농축해 양조하는 방식이 이에 해당한다. 늦게 수확해서 나무에 열려 있는 동안 건조시키는 방법도 있고 수확한 포도를 건조한 환경에서 널어 놓고 말리는 방법도 있다. 이탈리아의 레치오토 와인이 건조 방식으로 만드는 스위트 와인이다. 귀부 와인 역시 당을 농축시켜 만드는 스위트 와인에 해당된다. 속칭 귀한 곰팡이라고 불리 우는 보트라이티스 시네리아에 약한 포도 품종들의 경우 곰팡이에 전염이 되면 껍질이 약해져서 과육으로부터 수분이 증발되어 쪼글거리면서 당과 산이 농축된다. 보르도 쏘테른 지방의 세미용이 대표적인 귀부와인이고 그 밖에 헝가리 토카이와 독일의 베렌아우스레제(Beerenauslese)나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rockenberenauslese)가 있다. 반면 캐나다와 독일, 오스트리아에서는 포도 안의 수분이 얼게 되는 겨울에 수확을 해서 언 상태에서 껍질을 벗겨 얼음 조각을 제거해냄으로써 당이 농축된 상태에서 만드는 아이스 와인을 생산하기도 한다. 이처럼 건조나 냉동을 통해 당을 농축시킨 후 발효를 중단하면 잔당이 많이 남아 달콤한 와인이 만들어진다.[ii]

스위트 와인의 양조법을 이야기 하자니 자연스레 와인과 함께하는 식사 문화가 궁금해 졌다. 인간의 음식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추적한 마틴 존스(Martin Jones)<Feast>라는 책에서는 레스토랑의 역사적 배경을 읽을 수 있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는 무역이나 여행을 하던 사람들이 흔히 방문한 지역의 여관이나 음식을 먹는 공공장소에서 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제공하는 주인이 앉은 큰 테이블에서 정해진 시간에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테이블을 따블르 도뜨(table d’hôte)라고 불렀다고 한다. 큰 항아리에 담긴 음식을 나눠 먹었으며 만일 식사시간에 늦거나 먹는 속도가 너무 느리면 충분한 음식을 못 먹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코스 메뉴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지만 당시의 따블르 도뜨는 군주제도의 전통이 지역의 식사장소까지 이어져 내려온 영향 때문이었다. 군주제에서의 식사예법은 왕이 테이블의 끝에 앉아 일반 대중들이 그가 먹는 것을 지켜보게끔 하는 전통이 있었다. 비단 왕 뿐만이 아니라 귀족과 주교들도 마찬가지의 관습을 행하였다. 이후 산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여행을 하는 계급은 이 같은 공공장소의 맛없는 음식에 불평을 하곤 했는데 유일하게 예외적인 곳이 바로 프랑스 파리였다.[iii]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 이후 파리 레스토랑의 가장 큰 특징은 따블르 도뜨의 중요성이 줄어들거나 거의 미미해졌다는 사실이다. 분리된 테이블들과 혼자 앉을 수 있는 좌석들이 생겨나기도 했고 혼자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신문이나 다른 인쇄 매체를 즐기며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알파 매일(alpha male), 즉 우두머리 남성이 앉던 매우 화려했던 자리를 대체한 것은 거울과 촛불이었다. 손님들을 둘러싼 거대한 거울과 각 테이블에 타오르던 촛불이 레스토랑이 지출하는 주요 경비였다고 한다. 또 다른 두드러진 점은 레스토랑에 여성들이 손님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남성들은 뻔뻔하다고 비난을 하기도 하였고 유쾌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실 레스토랑 보다 먼저 생겨났던 17세기 유럽의 커피 하우스 혹은 카페는 레스토랑보다 일찍 다양한 지적 교류의 장소가 되어 왔다. 비즈니스가 행해지기도 하고 문학, 의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강의가 열리기도 했다.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고 실험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한 예로 영국의 유명 커피 하우스에서는 과학자 뉴턴이 돌고래 해부를 수행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토론과 논쟁, 민주주의, 급진적 정치의 산실이 되었고 프랑스 혁명 전야에 시민들을 무장시킨 곳도 바로 프랑스의 카페였다. 차를 마시던 곳과 식사를 하던 곳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카페와 레스토랑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문화를 만들어가던 공공장소라는 면에서 오버랩 된다.[iv]

마틴 존스의 문제의식은 사실 인간이 사회적 인간인지 아니면 생물학적 유기체인지를 묻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음식을 나눠먹는 행위를 하는데 단순히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는 행위도 함께 하는 등 문화를 창출했다는 관점이 전자이다. 반면 후자와 같이 인간이 음식을 먹는 것은 생물학적인 본능을 유지하기 위한 순전히 동물적 욕구에 기인한다는 관점도 존재한다.[v] 인간이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별다르게 생각해오지 않았던 나는 존스의 책을 읽으면서 역사에 따른 다양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군주제에서는 군주 또는 권력을 가진 남성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식사 문화였고,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에 따라 점차 수평적 식사 문화로 바뀌어 간 것이다. 과거에는 공동의 테이블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제공되는 품질이 안 좋은 음식을 일컬어 칭했던 따블르 도뜨가 오늘날에는 레스토랑에서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코스 요리를 뜻하는 의미로 변천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문화라는 것이 사회의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일종의 마르크시즘적 관점을 수용하지 않는다 하여도 적어도 사회 권력의 역학관계가 투영되는 것이라는 시각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이 식사가 단순히 생물학적인 욕구를 유지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경제와 정치와 문화라는, 즉 인간이 창출한 제도가 종합적으로 반영된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나는 인간은 사회적 인간이라는 관점에 한 표를 던지겠다.

솔직히 식사 문화만큼 사회와 시대를 정확히 반영하는 인간의 행위는 없으리라 본다. 특히 가족이나 친족집단과 같은 1 집단을 벗어나서 사회적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과 함께하는 식사 문화가 본격적으로 우리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하지 않을까 싶다.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간의 경제 활동은 배고픔이라는 동물적 욕구를 채우는 것은 물론 식사 모임을 통해 대화를 매개로 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교양 있는 본능 채우기의 활동이 아닌가 싶다. 중국 고사에서도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린다는 함포고복이 태평성대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음식과 정신적 여유가 한 국가의 경제지표임을 진작부터 알 수 있었다. 가계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엥겔지수라고 하고 일반적으로 고소득 가계일수록 엥겔지수가 낮다고 보아서 선진국인지 후진국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한 기준이 되고 있다. 선진국일수록 엥겔지수가 낮고 후진국일수록 높다는 것이 기본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식료품비를 떠나서 외식비를 따져보면 그 반대의 현상을 보여준다. 가령 엥겔지수가 가장 낮은 선진국인 미국을 예로 지난 백 년 동안의 가계소비 경향을 따져보면 가정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는 점차 낮아진 반면 외식을 하는 경우는 반대로 높아지는 양상을 보여준다. 아울러 미국의 부유층과 빈곤층 가계지출은 식료품비보다 주류와 외식 비용에서 더 큰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유층일수록 주류와 외식에 지출하는 비용이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vi] 문화적 차이를 반영은 해야겠지만 외식비의 지출이 많은 사회가 더 부유하다고 볼 수 있고 외식을 적게 하는 경우에는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외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마틴 존스나 여타 인류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음식과 식사 문화를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하는 연구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면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식사 문화가 후대에 의해 어떻게 평가를 받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사실 굳이 식사 문화의 역사와 식사 관련 개념의 어원을 따질 필요도 없이 나는 한 잔의 스위트 와인이 주는 유쾌함과 같이 식사를 즐겁게 마쳤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에린 마이어(Erin Meyer)가 쓴 <Culture Map>이라는 책은 복숭아 문화와 코코넛 문화라는 재미있는 구분을 한다. 미국과 브라질을 대표적인 복숭아 문화로 꼽으면서 설명하길, 사람들이 처음 만나서 나누는 친절함이 절대 신뢰나 우정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미국인들은 어려서부터 항상 처음 본 사람에게 미소 짓도록 교육받았을 뿐 겉으로 보기에 친숙해 보이는 어느 정도의 상호작용의 시간이 지나면 복숭아의 딱딱한 씨처럼 자신을 보호하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코코넛 문화는 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 처음 만나서 서로 웃지도 않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에는 코코넛 껍질처럼 매우 딱딱해서 힘들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따뜻하고 친근해 진다는 것이다. 관계를 맺는 매우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관계가 형성되면 오래 지속된다는 폴란드,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숭아 문화는 업무를 기반으로 신뢰관계를 형성하고 코코넛 문화는 관계를 기반으로 신뢰를 형성하기에 후자의 경우 특히 음식을 나눠 먹는 식사 모임이나 회식이 신뢰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vii] 내가 판단하기에 한국 사회는 복숭아 문화보다 코코넛 문화에 가깝다고 보인다. 중요한 의사결정에서부터 잡다한 수다에 이르기까지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함께 음식을 나눠먹으면서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문제는 과연 사회인들과 함께 하는 식사 모임, 특히 직장 동료나 상사와 함께하는 회식 자리가 유쾌하기만 하던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만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식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단 식사 시간을 즐겁게 만드는 대화 소재의 빈곤 때문이다. 때로는 회사 업무의 연장으로 생각될 정도로 업무 관련 내용만을 이야기 하는, 그래서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한국에서 속된 말로 뒷담화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가십거리를 이야기 한다. 그래도 조금 나은 경우는 정치에 관한 대화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고 주변에서 들은 회식 자리 뒷얘기에 따르면 이 세 가지를 제외하고 다른 소재의 내용으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회식 자리는 매우 드물어 보인다. 그만큼 서로 경쟁을 하며 허점을 보이면 안 되는 각박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로에게 마음을 열거나 긍정적인 감정의 교류를 나누는 대화의 기회는 매우 희박한 것이 현실이다. 폭탄주와 같은 강한 알코올에 의지하는 것도 이처럼 닫힌 식사 문화의 이면이 아닐까 싶다. 회식 자리가 즐겁고 유쾌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독서량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과도 연관된다. 나는 지식을 쌓기 위해 독서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애써 암기를 하지 않는 한 어차피 책장을 덮는 순간 내 기억 속에 남는 책의 내용은 많지 않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가상의 시공간에서 책을 쓴 저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데 가치를 둔다. 그러한 가상의 대화를 통해 때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기쁨과 슬픔을 느끼기도 하는 등 감정을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독서를 하면 내가 저자와 나눈 감성적인 대화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고 그것을 매개로 그들과도 유쾌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나는 사회인들이 회식 자리에서 앙상한 대화를 나누는 첫 번째 이유를 독서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감정의 교류를 매개하고 촉진시키는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회식 자리가 유쾌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프랑스 혁명 이전의 따블르 도뜨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대부분 조직이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그러한 수직적 문화가 회식 자리까지 침범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사장 혹은 부장과 같은 집단의 우두머리를 정점으로 배열해 앉아 마치 따블르 도뜨의 알파 매일에 머리를 조아리는 권위적 식사 문화가 일상화 되어 있다. 사실 식사 자리에서의 예의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 사회도 예전부터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식들이나 아랫사람에 대한 예절 교육을 주로 했던 기회가 주로 식사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식사를 자식에게 예의를 가르치는 중요한 기회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윗사람이 말이 아닌 몸소 보여주는 행동을 통해 예의범절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의라는 것은 윗사람의 권위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이다. 아랫사람의 윗사람에 대한 배려도 예의지만 반대로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 역시 너무나 소중한 예의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회식 문화를 고찰해 보면 우리는 항상 따블르 도뜨의 권위에 눌려 사는 것만 같아 아쉽다.

나는 스위트 와인 중 프랑스 남부에서 생산되는 뱅 두 나뛰렐의 매력에 한 동안 빠져 있었다. 머스 종으로 만든 스위트 와인답게 달콤한 꿀 향기 뿐 아니라 매우 화사한 꽃 향기가 피어 올랐던 것을 경험했다. 꽃이 꿀을 생산하고 꿀은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며 벌과 나비는 꽃가루를 교배하여 또 다른 꽃의 생명을 낳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아름다운 순환적 생태계이다. 우리의 식사 문화가 우리 사회의 인간 관계를 보여준다고 한다면 나는 이처럼 꿀과 꽃의 공생 관계가 되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즐거운 대화가 오고 가고 서로를 배려하는 예의를 갖춘 식사 문화라면 후세의 역사가들이 21세기의 식사 문화를 자랑스러운 문화 유산이라고 생각하며 자부심 속에 기록하지 않을까 싶다.




[i] Wine & Spirit Education Trust (2014). Wines and Spirits: Looking behind the Label.

[ii] Wine & Spirit Education Trust (2014). Wines and Spirits: Looking behind the Label.

[iii] Jones, M. (2007). Feast: Why Humans Share Food.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iv] Jones, M. (2007). Feast: Why Humans Share Food.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v] Jones, M. (2007). Feast: Why Humans Share Food.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vi] Thompson, D. (2013). “Cheap Eats: How America Spends Money on Food,” The Atlantic (March 8).

[vii] Meyer, E. (2014). The Culture Map: Breaking through the Invisible Boundaries of Global Business. Pacific Affairs: New York.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