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1장] 아주 은밀한 신사와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


밤하늘을 바라보면 떠있는 무수한 별들이 지구의 자전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관찰할 있다. 아마도 와인을 잔에 따른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풍미의 속도를 가늠해보면 우리가 느끼는 별자리 움직이는 속도와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와인의 향은 아로마(aroma) 부케(bouquet) 나뉘는데, 전자는 포도 자체에서 얻어지는 향이고 후자는 발효한 포도주스를 오크통에 넣어 숙성을 시킨 얻어지는 향을 말한다. 오크통을 제조하는 과정 중에 나무판자를 둥글게 구부리기 위해서 불에 그을리는데 이때 생성되는 토스티한 향들이 숙성 과정 동안 포도에 전이된다고 한다.[i] 포도 자체의 과실 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처럼 오크 숙성을 통해 형성되는 향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버터, 바닐라, 초콜렛, 커피, 타르, 시가, 숙성을 통해 형성되는 스모키한 향을 즐기곤 한다. 아마도 포도에서는 생겨날 같지 않은 향미들이라 신기하게 느껴지는 탓일 게다. 물론 과실 향도 포도와는 요원해 보이는, 가령 열대과일 이라던가 향기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어서 매력적인데, 오크 풍미가 보다 복합적인 향을 더해주기 때문에 이끌리는 같다. 이렇게 다양한 향들이 한꺼번에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와인이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기와 접촉하면서 다른 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닐라에서 시가로, 시가에서 향으로 천천히 변화하는 식이다. 이탈리아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Montepulciano d'Abruzzo) 와인을 마셨을 , 이제껏 내가 마셔본 다른 어떤 와인들 보다 시간에 따른 향미의 변화가 두드러졌다는 점이 사뭇 별자리의 움직임을 연상시켰다.

전문 분야를 떠나 생소한 다른 영역을 도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의 삶도 물리학에서 얘기하는 관성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이 유지해 오던 습성을 버리고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예술의 영역도 마찬가지인데 특히나 장기간의 훈련과 연마가 필요한 데다가 상당기간 동안 장르에서 활동한 데 따른 관성이 존재하기에 장르간을 교차하여 넘나드는 예술가들에게는 경외심 마저 들기도 한다. 안톤 코르빈(Anton Corbijn) 사진작가로 명성을 쌓다가 영화감독으로 변신을 경우다. 그가 감독으로 데뷔한 영화 작품에서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를 등장시킨 것은 순전히 우연일지도 모르나, 와인의 변화와 영화 주인공의 변화, 그리고 자신까지 하나로 궤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발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매우 은밀한 신사>라는 원작소설이 <아메리칸>이라는 영화 제목으로 바뀐 것은 어찌 보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탈리아,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인에 대한 생경함, 혹은 영원한 이방인으로 간주하고자 하는 뚝심을 자폐적 주인공을 빌어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 읽힌다. 총기를 제작하며 살인청부업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인 주인공은 목숨의 위협을 느껴 이탈리아의 한 시골 마을, 아브루쪼(Abruzzo)로 잠입해 들어와 은둔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하룻밤 돈을 주고 산 매춘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살인청부업자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떠나 새로운 삶을 계획하던 중 그를 쫓아온 살해범에 의해 피습을 당하지만 결국 목숨을 걸고 도망쳐서 사랑하던 여인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그녀의 품에 안 생을 마감한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 계기가 된 어느 날 밤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둘이 함께 마신 와인이 바로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다. 폐쇄적으로 은둔하던 폭력세계의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사랑을 쫓는 로맨티시스트로 변하는 영화의 플롯에서 비록 와인이 등장하는 시간은 불과 몇 분에 이르지 않았지만, 그 즈음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 와인의 생명력 있는 향미의 변화에 매력을 느끼던 나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메리칸 이방인마저도 사랑에 눈뜨게 만드는 매력적인 와인이라는 생각을 제작진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억측을 해보 나를 발견하며 그 와인에 대한 나의 애정이 상당하다는 것을 깨닫는.

아브루쪼 지방은 이탈리아 중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아드리아해를 면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주 품종이 몬테풀치아노인데 검붉은 색의 무거운 바디감과 점성 어린 질감이 특징이다. 와인 샵을 쇼핑하다 보면 흔히 듣는 이야기가 이탈리아 와인은 높은 산도를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런 것이 이탈리아 와인의 대표적 품종인 네비올로(nebbiolo)와 산지오베제(sangiovese)가 전통적으로 모두 상큼한 강한 신맛을 살리는 방향으로 양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네비올로는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Piemonte) 지방에서 주로 재배가 되며 와인의 왕이라 일컬어 지는 바롤로 와인, 그리고 그보다는 가치가 조금은 떨어지지만 가성비가 좋다는 바르바레스코(barbaresco) 와인의 주요 품종이다. 지리적으로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 인접해 있어서 가볍고 신맛이 특징인 피노 누아(pinot noir) 비슷한 특징을 지녔 일컬어진다. 피에몬테 아래의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토착 품종인 산지오베제 역시 산도가 높은 키안티(Chianti) 와인으로 알려졌다. 토스카나 지방 중에서도 몬탈치노(Montalcino)에서 생산한 가장 고급스러운 산지오베제 와인을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조금 혼동될 있으나 토스카나에 몬테풀치아노라는 지역도 있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인 비노 노빌레 몬테풀치아노(Vino Nobile di Montepulciano)역시 산지오베제 기반의 와인으로 아브루쪼의 품종과는 별개임을 말해둔다. 아무튼 전통적으로 산도가 높다던 이탈리아 와인이 프랑스 보르도 품종을 이식하여 재배, 양조하면서 수퍼 투스칸(Super Tuscan)이라는 영역을 개척하는 등 바디감과 질감을 다소 무겁고 진하게 하는 방향으로 변모한지는 이미 오래되었으나 산미를 강점으로 마케팅 하는 전통은 그 수요가 존재하는 한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ii]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 와인이 무겁고 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같은 전통적 이탈리아 와인 이미지와 대비가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나, 프랑스나 미국의 흔히들 묵직하다는 와인들을 골라 비교 시음을 해보아도 여전히 강렬하게 다가오기는 마찬가지였다. 강한 와인들은 대게 힘이 있어서 산화에 저항력이 강하기에 풍미가 일단 열리기만 하면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되는 반면 조금 귀찮긴 하지만 디캔팅(decanting) 필수다. 코르크 마개에 닫혀있던 와인을 공기와 접촉시켜 특유의 향미가 제대로 살아나게 만드는 디캔팅 혹은 브리딩(breathing) 보통 시간 이상 지속되기 마련이고 와인 향미의 변화를 감지할 있는 최적의 순간이다. 어떤 와인 전문가의 경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은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 제대로 하려면 디캔터라는 도구를 사용해야 하기에 나는 주로 글라스 잔에 따른 식사를 천천히 하며 아로마향, 부케향, 그리고 와인 미각이라 일컬어지는 팔레트(palate) 변화를 즐겁게 감상하곤 한다.[iii] 앞서 말했듯이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에 매료된 것은 와인 향과 맛의 여러 번에 걸친 변신 때문인데 여기서 별자리의 움직임이 일치되는 듯한 착각 아닌 착각을 것은, 후각과 미각의 변화가 시각적 움직임과 일치가 되는 오묘한 통감각적 경험이었다.

소위 말해 내가 가진 나이브한 과학적 분석력을 동원하자면, 와인의 변화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결국 향미를 구성하는 입자들의 움직임이기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지각할 때와 동일한 차원의 물리적 원리로 설명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심오한 통감각적 경험의 진미를 떨어뜨릴 있지만 우리가 살면서 눈에 보이지 않아 놓치고 있는 세계에 대해 비로소 눈뜰 수 있게 해준다. 사람들은 눈으로 확인되는 상처에만 책임을 지고 죄값을 치르곤 하지만 상대방에게 내뱉은 공격적 언사를 통해 전달되는 해로운 입자들, 그로 인해 상처받는 감정의 입자들이 다 눈으로 확인된다면 형이상학적폭력마저도 근절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마찬가지로 기쁨, 환희, 즐거움 등 행복의 감정을 구성하는 입자들도 시야에 들어와 확인만 된다면 우리는 신과 우주 만물과 인간에 대해 고개 숙여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할 것이다. 결국 변화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의 움직임이고 이러한 입자 운동의 물리적 역학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존귀함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와인의 생명력을 감각기관으로 확인하는 작업은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내 감정의 입자도 함께 움직였기에 즐거웠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와인의 향과 나의 감정과 별자리가 트리오를 이루어 산책하는 듯한 느낌이라는 표현이 혹시라도 유치한 과장으로 비춰질 까봐 우려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고민에 빠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 모든 변화를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분명 변하지 말았으면 하고 어린 시절 줄다리기 붙잡듯이 잡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들의 변화도 우주만물의 원리로 받아들이고 환영해야 할까. 아무리 건강과 젊음이 좋다 한들 생로병사의 이치를 거부할 수는 없다는 까진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장 따뜻한 위로와 가장 논리적인 변명을 한데도 결코 받아들일 없는 것은 바로 변하는 사랑이 아닐까 한다. 어차피 로맨틱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언급했으니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랑 영화 하나를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살면서 보았던 영화 제목 기억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언제인지 명확히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래 전에 영화인데도 지금까지 제목이 기억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 제목과 똑같았기 때문일 게다. 연분홍 치마가 바람에로 시작되는, 나의 부모님 세대에게 조차 '올드'하게 들리는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의 처량함이 그리 심금을 잔잔하게 울리는 아직도 모르겠다. 영화의 스토리 라인도 정확히 기억이 안 나고 정작 내가 좋아하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렸었는지 조차 기억이 가물가물 한데 가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영화 남자가 헤어지려는 연인에게 허탈하게 묻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는 대사다.

십중팔구는 변한다. 아니 변한다고 보는 것이 진실이다. 그런데 정작 변화가 문제가 아니라 변하는 사랑에 실망하여 갈등하고 헤어지는 우리가 문제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이혼율 때문일까. 우리가 백년해로를 부부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모진 세월의 갈등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라는 관습을 유지한 사실이 한결같은 사랑으로 비춰지기 때문이지 정작 어떻게 사랑이 슬기롭게 변모해 왔는지 에는 주목을 못한다. 우리는 유독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망과 환상을 가지고 있을 아니라 불변의 사랑이 진정한 로맨스이자 인간의 윤리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낭만적 사랑이 변하지 않고 영원하기를 꿈꾸기 때문에 중년의 권태기에 괴로워 몸부림 치곤 한다. 가끔 방송에 나와 중년 부부 권태기를 극복하는 팁을 이야기하는 강사들을 보면 대부분이 이십 대의 로맨스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부부들의 생활태도를 나무란다. 혹자는 항상 기대에는 실망이 따르기 마련이므로 상대에 대한 사랑의 기대를 낮추라는 나름 심리학적 언변을 토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오십 대에 가슴 떨리던 이십 대 청춘의 사랑을 유지하려는 부자연스러움 내지 불가능의 도전도 싫고, 불 붙은 사랑을 꽃도 피기 전에 기대를 낮추라면서 물주전자 붓듯 꺼버리기도 싫다. 대신 촌스런 나의 처방 법을 더하고자 한다. 농부가 되어 사랑 농사를 지어보면 어떨까.

사랑이란 것도 감정의 입자인데 입자운동을 하며 움직이는 건 당연하다. 변하지 않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농촌에 사는 부부들의 이혼율이 도시보다 낮은 것도 어찌 보면 인스턴트 같은 도시적 사고방식과 문화에서 벗어나 있어서라기 보다는 농사를 지으면서 변화라는 자연의 섭리가 자연스럽게 속에 베어 들었기 때문이기 쉽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 모내기를 하고 가을에 수확을 하며 겨울 한파에 대비하기까지 농부들은 변하는 계절과 토양, 예측할 없는 날씨와 환경에 끊임없이 대비하며 최고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예술가들보다 아름다운 창조자들이고 물리학자들보다 명석한 입자운동의 증인들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해서 사랑도 인간들이 일구어내는 농작물이라 간주하는 사고의 전환을 조심스레 제안해 본다. 만일 지금 누군가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묻고 싶다. 변화를 자연스러운 이치로 갈망하고 추구해 봤던가. 인생의 분기마다 다른 모습이 소생하도록 흘려 경작했던가. 궂은 날씨와 한파, 급작스런 홍수와 가뭄에 미리 대비하여 굳건히 견뎌낼 있도록 얼마나 노력했던가. 이십 대의 로맨스를 억지로 부여잡기 보다는 삼사십대의 지루하지만 원숙한 사랑, 오륙십 대의 단조롭지만 정겨운 사랑으로의 변화를 꿈꾸는 농부의 마음을 가져보는 어떨까. 바닐라의 사랑에서 시가의 사랑으로, 다시 꽃의 사랑으로 변화하는 사랑을 일구어 내는 농부들이 진정한 로맨티시스트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 로맨티시스트가 되어 와인 잔에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를 따라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와인의 향과 하늘의 별과 함께 한적한 산책을 해보기를 권유한다.




<참고도서>

[i] Marshall, W. (2010). What’s a Wine Lover to Do? Artisan Publisher.

[ii] Bastianich, J. & Lynch, D. (2002). Vino Italiano: The Regional Wines of Italy. Clarkson Potter/Publishers: New York.

[iii] Marshall, W. (2010). What’s a Wine Lover to Do? Artisan Publis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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