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9장] 피아졸라의 탱고를 말벡과 함께

나는 말벡을 통해 전달되는 아르헨티나인들의 예술 사랑이 참 좋다. 말벡과 피아졸라의 뒤에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


운송 수단이 종종 와인의 역사를 바꿔놓았듯이 16세기부터 이미 포도재배가 시작되었던 아르헨티나에서 와인 산업이 급속히 번성하게 된 계기는 19세기 후반 철도가 놓이면서부터 이다. 와인 산지 멘도사(Mendoza)와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를 잇는 철도가 설치되면서 와인이 상하지 않고 3일만에 마켓에 도달하게 되었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좋은 품질의 와인을 마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철도를 놓기 이전부터 멘도사는 전략적으로 와인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가령 포도 재배 사업자들 대상의 세금 감면이라던가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포도 재배 경력이 있는 이민자들을 대폭 받아 들였던 정책을 말한다. 그래서 20세기 초에는 전체 와이너리의 70퍼센트가 유럽의 와인 문화에 익숙한 이민자들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와인은 다이어트 음료로 간주되어 칼로리의 원천이기도 했고 마시기에 좋지 않은 물을 대체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빵과 고기에 이어 소비 순위 3위에 오를 정도로 소비량이 급증했다고 한다. 1950년대를 지나면서 와인 붐이 일어나서 1970년대 말 기준으로 일인당 연간 평균 와인 소비량이 무려 90리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0년대 정부 부채와 인플레이션 등 경제 위기에 따라 와인 산업도 타격을 입게 된다. 이에 아르헨티나인들이 즐겨 마시던 레드 와인 말벡(malbec)도 인기가 시들해졌고 화이트 품종 중 품질은 안 좋지만 값이 싼 와인을 주로 생산하게 되었다. 1990년대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의 경제 개혁으로 아르헨티나 경제가 다시 부활하였고 삶의 질이 높아지게 된다. 정부는 외국인들이 아르헨티나 와인 산업에 투자하는 것을 촉진하였다. 아르헨티나인 소유의 와이너리들은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외국인 컨설턴트를 고용하여 이들의 자문에 따라 경영을 하였는데 이들 유명 컨설턴트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와이너리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거나 인수를 하기도 하였다[i].

아르헨티나인들 사이에서는 프렌치 와인으로 불리며 인기가 있는 말벡은 헝가리 이민자가 프랑스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보르도가 와인 중심지가 되기 전 중세 시대에는 프랑스 남서부 까오르(Cahors)라는 지역이 와인 산지로 더 명성을 날렸는데 이곳에서 말벡을 처음 재배하였다고 한다. 18세기 이후 보르도로 와인 중심지가 옮겨 가면서 말벡이 그곳에서 재배되었으나 20세기 필록세라로 인해 거의 멸종이 되다시피 하여 현재는 보르도 블렌딩 와인의 1퍼센트 정도 비중만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 와인 산업이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던 아르헨티나에서는 프랑스 이미지를 가진 와인 사업을 발전시키고자 19세기 중반 프랑스인 농업 경영학자를 고용하여 프랑스 품종을 이식, 재배하게끔 하였다. 특히 안데스 산맥 기슭의 작은 언덕에 위치한 멘도에서 이 말벡 품종이 잘 번식하였고, 아르헨티나인들의 사랑을 받아 지금의 대표 품종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파솔리노(Fasolino)의 책을 보면 사실 말벡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도 많이 재배가 되었는데 금주법이 시행되면서 수익이 나는 과일 나무를 심기 위해 포도 나무들을 제거 하면서 소멸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껍질이 얇아서 너무 빨리 익는데다 병충해와 질병에 약하다는 단점 때문에 진가를 몰라보았고 그래서 금주법이 끝난 이후에도 기후에 강한 품종을 주로 재배하면서 말벡은 미국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된다.[ii]

짙은 퍼플 색을 보여주는 말벡의 두드러진 특징은 껍질이 얇다는데 있다. 단순히 얇다는 게 특이한 점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껍질의 품종이 보여주는 캐릭터를 온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한 탄닌감과 바디감, 그리고 남성적 힘을 느끼게 해주는 와인으로 파솔리노의 표현에 따르면 가축 떼를 몰고 가는 말을 탄 카우보이를 생각나게 한다는 와인이다. 하지만 말벡은 재배 지역에 상관없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날씨가 습해지면 곰팡이가 쉽게 생기기도 하고 너무 빨리 익어서 자칫 적절한 수확 시기를 놓치면 지나치게 농익어 밋밋한 와인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열매가 너무 많이 열려서 가지 치기 등을 통해 산출량을 적절히 조절하지 않으면 복합미가 떨어지는 너무 가벼운 와인 만들어지는 단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건조한 기후가 곰팡이와 병충해에 잘 견디게 해주었고 적절한 가지 치기 등 산출량을 잘 조절하는 등 그 진가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미국과 달리 힘있는 남성적 캐릭터의 아르헨티나 대표 와인으로 성장하였다.[iii]

말벡이라는 와인을 기 전에 내가 가졌던 아르헨티나의 이미지는 탱고와 유명 예술인들로 형성될 정도로 지식보다는 감성으로 다가온 나라였다. 대부분 남미 국가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개발이 더디지만 예술과 문화를 즐길 아는 나라라는 막연한 동경심을 심어주었는데 중에서도 아르헨티나가 유난히 두드러졌다. 얼핏 여행객으로부터 쿠바나 아르헨티나에서는 길거리 일반인들 모두가 예술가들 같다는 얘기를 들은 같기도 하다. 2009년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제안이 승인되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된 탱고는 유럽과 아프리카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우루과이에서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이 즐겼다는 깐돔브(candombe)라는 가무에 영향을 받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하층 계급 지역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이민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iv] 싸구려로 치부될 수도 있었을 거리의 예술이 인류가 보존해야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일종의 예술적 혁명이다. 곰팡이와 병충해에 약하고 재배가 어려워 천덕꾸러기 같이 취급되던 말벡의 진가를 알아보고 육성하여 오늘 와인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품종으로 키워낸 아르헨티나인들의 혜안 내지 선견지명이 겹쳐지는 대목이다. 예술작품이 온전한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의 수용자, 관객들의 음미와 공감이 필요하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유독 뛰어난 예술작품이 당대의 관객들에게는 외면당하고 후세에 진가가 인식된다는 일종의 법칙과도 같은 예술의 흥망사를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없다. 뛰어난 예술 작품일수록 당대에 일반화된 예술적 경향을 뛰어넘는 창조성을 보여주기에 관객들이 가진 사회 문화적 관습을 깨고 새로운 조류로 인식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 이해는 간다. 반 고흐의 곡선 터치와 스트라빈스키의 도발적 교향곡 등이 당대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했던 사실을 두고 당시의 관객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천시받던 작품들이 명맥이 유지되고 후대에나마 빛을 보게 된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른다. 내 머리 속에서 아르헨티나의 이미지를 말벡이 대체하기 전 오랜 동안 자리 잡았던 탱고는 예술 가치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깨닫게 하는데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주 어렸을 적 내가 가지고 있던 탱고 음악의 이미지는 라쿰파르시타와 같은 힘있는 춤곡 이었다. 아마도 집안 어디에선가 부모님이 LP판으로 틀어놓은 음악을 자주 접한 탓일 게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난 뒤 유난히 내게 탱고의 매력을 어필한 음악가는 바로 아르헨티나 탱고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였다. 이제까지 판에 박혔던 탱고의 관성을 뛰어넘는 그래서 과연 탱고라고 할 수 있을까, 탱고 플러스 알파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었다. 적어도 내게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었다. 피아졸라의 탱고가 클래식 음악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우아하고 고상한 탱고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게는 정형화된 클래식의 선율이 느껴진다기 보다는 자유분방한 재즈의 열정이 앞선 음악이었다. 10대의 내가 학교 교육을 통해 클래식 음악에 길들여졌던 때였다면 나의 20대는 재즈의 흥과 열정과 교감에 심취했던 때였다. 지금은 손이 다 굳어 버렸지만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악기인 피아노로 예를 들면 쇼팽과 같은 감미로움을 주었던 빌 에반스(Bill Evans)에서 재즈의 대중성과 예술성이 그리도 잘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싶었던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에 이르기까지 백인 재즈와 흑인 재즈를 망라하여 들으며 음악적 감성을 가꾸곤 하였다. 때로는 칙 코리아(Chick Corea)와 같은 라틴 재즈도 내 정체성에 묻혀 있는 예술적 감수성을 자극하였다. 그러다가 내 재즈 감상의 정점을 찍은 피아니스트는 텔로니어스 멍크(Thelonious Monk)였다. 우연히 시애틀을 여행하다가 재즈 전문 음반 샵에서 구입한 CD 3장이 담긴 멍크의 컬렉션 앨범은 지금도 나의 음반 보물 1호에 해당한다. 보통은 클래식 음악 교육을 베이스로 하여 재즈 뮤지션으로 탈바꿈하는 백인들에 비해 흑인들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아 정식 클래식 교육을 받지 못한 음악가들이 많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 재즈의 뿌리는 흑인들 특유의 한과 정서가 투영된 소울이나 블루스, 그리고 독특한 아프리칸 리듬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노예로 살며 받던 핍박을 음악을 통해 잠시나마 릴리즈하는 흑인들 사이의 교감의 음악이었던 것이다. 멍크는 그러한 흑인 재즈에서 몇 발은 더 나아간 것처럼 들렸고 그래서 사람들이 멍키쉬 스타일이라는 독립된 명칭을 붙이는 것도 무리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재즈의 특징인 임프로바이제이션(improvisation)을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해석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장르의 음악으로 탈바꿈시키는 그의 유난히 튀는 창의성은, 솔직히 멍크를 알게 된 이후로 재즈의 흥미를 잃게 될 만큼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과연 멍크를 뛰어 넘을 만한 재즈 뮤지션이 또 나올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갓 서른이 되었을 때 멍크 이후 흥미를 잃었던 나의 재즈 감상에 다시 작은 파문을 던진 음악이 바로 피아졸라의 탱고였다.

내가 한 국가의 예술적 융성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일반인들의 열린 향유이다. 품격 예술성을 추구하는 하이 컬쳐(high culture)와 보편적 대중성을 중요시하는 로우 컬쳐(low culture)의 구분 없이 순전히 자신의 기호에 따라 좋아하는 예술 작품을 열린 마음으로 즐기는 태도, 나는 그게 너무나도 부럽다. 우리에게 그런 열린 향유의 태도가 부족한 이유는 음악조차도 엘리트적인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탓일 게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대부분 머리로 베토벤의 국적은 알아도 정작 귀로 베토벤의 교향곡을 판별해내는 음악성은 부족한 것이다. 창의력이 아닌 지식 중심 교육, 본질이 아닌 외피 중심의 교육으로 인해 예술이 때로는 딴따라라고 천시받기도 하고 때로는 식자층과 부유층의 교양을 뽐내는 재료 정도로 취급되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몇 년 전 그림 개인전을 열었을 때도 관객으로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림의 문외한이라 잘 감상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을 토로하였다. 나는 가식적 겸손의 태도가 아니라 마음 속 깊이 우러나오는 심정으로 그림을 머리고 알려고 하지 말라고 그냥 가슴으로 느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내가 관객들에게 그러한 부탁을 한 이유는 내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변호이었을 수도 있다. 솔직히 어려서부터 정식으로 그림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전시회를 열 자격이 있는가 싶은 콤플렉스가 내 마음 한 켠에 있었기 때문이다. 콤플렉스가 발현될 때마다 예술의 높은 문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존재할 지라도 나 같은 아마추어 작가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국민 전체의 자유로운 예술적 향유가 발돋움한다는 자기 최면을 걸기도 하였다.

대학 강단에 선지 7년차가 되었을 때 주어진 안식년을 프랑스 파리에서 보내면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연마한 나는 프랑스의 예술이 왜 발전했는지를 피부로 느낄 기회가 있었다. 파리에는 서점 만큼이나 화방이 많이 눈에 띌 뿐 아니라 종종 들를 때마다 서점 보다 화방이 더 붐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그림 그리기가 국민들 사이에 보편화 되어 있고 크고 작은 규모의 많은 아뜰리에와 워크샵 등을 통해 일반인들이 격의 없이 그림 그리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무수히 많았다. 모델을 가운데 두고 내 옆에서 그림을 열심히 그리던 파리지엥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면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열심히 그림을 즐길 따름이었다. 고흐 피카소 등 미술사를 빛낸 유명 화가 들이 한결같이 일생의 일부 또는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내며 그림 작업을 한 이유도 바로 국민들의 예술에 대한 사랑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얼마 전인지 기억 확실히 없지만 해당 시기의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을 표지에 싣는 매거진인 타임지가 한번은 당신이라는 인물을 정하였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가는 인터넷의 영향력을 두고 그 주체가 바로 일반 인터넷 이용자들 개개인이라는 아이디어에서다. 사실 음악사가들이 피아졸라와 몇 명의 연주자들을 탱고의 계승자들로 기록하고는 있지만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탱고가 융성하게 된 배경은 다름아닌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탱고를 즐기던 일반 시민들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소수의 스타에 의존하지 않고 대중적으로 즐기는 문화가 있었기에 오늘 날 탱고가 전 세계적 인정을 받는 것이며 그래서 탱고 음악가들이 더 빛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소수의 스타가 좌지우지하는 문화 예술은 미래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 스타가 사라졌을 때 그가 드리우던 영향력을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 생각해 보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화 예술은 여전히 스타덤 생산 시스템에 의존하여 소수의 스타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그들의 경제적 효과에 의존하는, 마치 부실공사로 지은 건물의 취약한 기반을 보여주는 듯 해서 마음이 아프다. 이는 특히 대중 문화 영역에서 심각하게 드러난다. 유력 언론을 통한 스타 생산 메커니즘이 지속되는 한 우리 문화 예술의 저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다. 유난히 경기와 스타성에 민감해 시장에서의 인기와 영향력의 기복이 심한 케이 팝(K-Pop)과 한류를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현실체감할 수 있다.

말벡이 아르헨티나의 대표 품종이 되며 전성기를 누리는 데는 말벡 와인을 사랑한 아르헨티나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아졸라가 아르헨티나의 국격을 높일 정도의 명성을 누리게 된 이유도 거리의 일반인들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즐기고 향유하는 탱고 문화의 저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설사 아르헨티나의 유명 와인메이커들이 생을 마감한 들 말벡은 계속 아르헨티나에서 번성을 하리라 본다. 피아졸라 사후에도 아르헨티나의 탱고 예술이 계속 번성을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의 진가는 그 누구도 아닌 관객들이 알아주는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 케이 컬쳐(K-Culture) 또는 케이 아트(K-Art)의 주인공이 되어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해 봤으면 하는 마음이 한낱 꿈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i] Goldstein, E. (2014). Wines of South America: The Essential Guid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Oakland, CA.

[ii] Fasolino, S. J. (2012). Malbec: Beginners Guide to Wine. 101 Publishing.

[iii] Fasolino, S. J. (2012). Malbec: Beginners Guide to Wine. 101 Publishing.

[iv] Oflaherty, T. (2015). Tango: Argentine Tango Music, Dance and History. Available through Amazon Digital Service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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