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8장] 시실리 섬의 두 얼굴

고대 신화의 무대가 되었던 에트나 산이 위치한 시실리는 격변의 세월을 거쳐온 비해 정작 그 섬을 방문한 여행객들은 한결같이 평화롭고 고요하다는 찬사를 보낸다. 생산되는 와인의 캐릭터 역시 서로 상반된 양면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의 역사를 읽어보면 시실리아인의 양면성은 민족적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지혜로운 발상이었다.


우리에게는 마피아의 본 고장으로 알려져 있는 시실리(Sicily) 섬이 최근에는 관광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861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 남과 북의 갈등은 심화되었는데, 농업 기반의 낙후된 남부는 산업화된 북부 이탈리아의 제품을 소비하는 시장이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깨끗하고 발전된 이탈리아 북부와 달리 소매치기와 범죄로 점철되어 있는 남부 도시들의 스테레오 타입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시실리 섬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지중해의 가장 큰 섬인 시실리는 사실 와인 생산에 있어서도 이탈리아에서 일등을 다툴 정도로 넓은 재배 면적을 자랑한다. 역사적으로도 그곳의 포도 재배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에 명성을 떨쳤고, 로마 제국 시대에는 마메르띠네(mamertine)라고 하는 스위트 와인이 율리우스 시저를 비롯한 지배 계급의 사랑을 독차지 하기도 하였다고 캐런 맥닐은 설명한다. 스위트 와인 이야기를 꺼냈으니 말인데 시실리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마르살라(marsala)라는 것이 있다. 달콤한 스위트 와인으로 이탈리아 내에서도 특히 시실리에서 디저트 문화가 발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쉐리(sherry)나 포트(port)와 같은 주정강화 스위트 와인으로 성공을 보았던 영국에서 프랑스의 와인을 대체할 필요성을 느꼈던 한 영국 상인에 의해 18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고급 와인으로 만들어진 마르살라이지만 한때는 벌크 와인처럼 대량 생산되기도 하였으나 유독 디저트 문화가 발달된 지역이니 만큼 관광객들이 반드시 시음해 보는 주종이기도 하다.[i]
  
최초로는 중국인들이 만들었지만 아랍인들을 통해 시실리에 소개된 샤베트는 시실리 아이스크림의 기원이 된다. 보통은 이탈리아에서 젤라또라고 불리는 아이스크림을 통해 본 시실리 디저트 문화는 대부분 아랍 문화에 기반을 두는 것으로 시실리 문화를 설명할 때 아랍을 빼놓고 논하기는 어렵다고 바스티아니치(Bastianich)와 린치(Lynch)는 이야기한다.[ii] 존 키히(John Keahey)가 쓴 <Seeking Sicily>에서도 시실리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온 민속문학의 주인공이 그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아랍의 민속문학에 동일한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9세기부터 오랜 동안 무슬림의 통치를 받았던 시실리의 문화에 미친 아랍의 영향이 곳곳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 남동부 풀리아 지방도 12-13세기 저항적이었던 아랍계 시실리아인들이 축출되어 정착한 대표적인 지방이라서 아랍 문화가 시실리를 거쳐 심지어 이탈리아 반도까지 전파된 흔적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시실리 문화 뿐 아니라 시실리아인들의 멘탈리티를 통해서도 이탈리아와는 분리된 그들의 정체성을 관찰할 수 있다. 키히에 따르면 시실리 사람들은 정작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소속감을 가지기 보다는 시실리아인이라는 독립된 정체성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리적으로도 이탈리아의 남부라는 생각보다는 아프리카의 북부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라는 것이다.[iii]

키히가 직접 인터뷰한 시실리아인들은 그들이 다양한 민족에 의한 오랜 식민지 경험 때문에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불안감을 교만함과 거만함으로 가리고 있다고 한다. 때로는 여기에 불신과 비관주의도 더해진다. 처럼 일관되지 못한 태도에 대해 한 시실리 토박이는 시실리가 얼굴을 가졌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시실리아인들은 매우 개방적인데 반해 동시에 폐쇄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끊임없는 침략의 역사와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설명된다. 침략을 받았을 도망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는 침략자로부터 이득을 얻어내기 위해 개방적이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실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마음 깊은 곳을 숨겨야 하는 폐쇄성이 발달하게 것이다. 이 같은 양면성이 콤플렉스로 남아서인가. 시실리에서 누군가가 냉소적이라는 말은 원칙이 없다는 의미이다. 바람의 방향이 바뀜에 따라 이리 저리 태도를 바꾸는 사람이란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람을 기회주의자나 위선자로 부르는 것에 더하여 냉소적인 사람까지 이중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그들의 콤플렉스를 얼핏 읽을 있다. 혹자는 이러한 시실리의 양면성을 에트나(Etna) 화산에 비유하기도 한다. 유럽에서 가장 화산인 에트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아름답고 비옥한 토양이지만 순간에 목숨을 앗아갈 있는 존재와 같다는 . , 친절하고 젠틀한 반면 공격적일 있는 , 달콤함과 공격성 혹은 단맛과 신맛이 공존하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이러한 시실리의 양면성이 일반적인 이탈리아인들과 다른 점이고 또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차이를 낳는 특징이다. 가령 한번도 외침을 경험하지 않은 나라 대비되는 지점이라는 주장이다.[iv]
  
시실리아인들이 섬에서 고립된 삶을 살고자 하지 않는 한 대륙 반도의 민족들과 교류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강제적 침략이든 협력적 교류던지 간에 타 민족의 영향력을 어떻게 배척 또는 수용할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고, 섬 나라라는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양면적 민족 정체성을 만들어 민족성의 보존과 경제적 생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던 거라 할 수 있다.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에다가 고대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경험했고 식민지 역사로 점철된 시실리 심지어 이탈리아 반도와도 구분되는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해온 데는 식민지 속국의 국민으로서 이처럼 지혜롭고 현명한 대응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시실리의 두 얼굴이라 화두를 정하게 된 배경은 내가 시음했던 시실리 와인들을 통해 그들 와인 문화의 양면성 때문이었다. 마르살라를 중심으로 한 디저트 와인을 넘어선 시실리 레드 와인의 혁신은 토착 품종 보다는 국제 품종이 이끌었다. 시실리아인들은 토착 품종을 보존하고 개발하여 시장화 하기 위한 목적에서 전략적으로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등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 기원을 둔 국제 품종으로 먼저 와인 산업의 혁신을 이루었다. 이미 시장에서 높이 평가되던 국제 품종 와인을 생산하여 시실리 와인의 이미지를 제고한 본격적으로 토착 품종 와인 산업을 육성했던 것이다.[v] 국제 품종으로 시작한 와인 산업이 제대로 육성되면서 자연스레 토착 품종까지 혁신을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나는 문득 시실리아인들의 지혜로움이 떠올랐다.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여 생존을 위해 그들의 문호에 개방적이 되는 동시에 시실리아인들의 가슴과 영혼 속에 심어져 있는 민족 정체성을 보존하는 슬기로움이 뇌리에 각인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중성이나 양면성이란 단어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어서 기회주의자처럼 해석되기는 하지만 시실리아인들이 가진 양면성은 융통성 내지 현명함으로 해석되는 것도 실리와 명분을 다 챙긴 그들의 부인할 수 없는 강인함, 그것도 문화적 다원성에 기반한 우직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시실리 와인 문화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국제 품종과 토착 품종이라는 이중적 측면 뿐 아니라 토착 품종들 가운데에서도 양면성이 드러난다. 가령 많은 생산량을 자랑하는 토착 품종인 네로 다볼라(nero d’avola)가 이탈리아 반도 북서부 피에몬테 지방의 바르베라(barbera)를 떠올린다고 일컬어 지지만 나에게는 바르베라 뿐 아니라 보르도의 힘이 느껴지곤 했다. 이와 반대로 네렐로 마스깔레제(nerello mascalese)라는 토착 품종은 많은 와인 애호가들이 시실리의 피노 누아라고 입을 모으듯이 가벼우면서 우아한 향미를 뽐내는 와인이다.[vi] 지역에서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향미를 갖는 토착 품종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언뜻 생각해도 사실 힘든데 시실리아인 다움을 떠올려보면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타산지석이라고 했던가. 나는 시실리가 보여주는침과 식민지의 역사를 통해 한국을 떠올려 보았다. 한국 역시 역사를 보면 끊임 없이 외침에 시달렸고 결과 심지어는 남과 북이 분단된 채로 살고 있다. 조선 시대 외세를 두고 벌였던 파벌 논쟁,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배에 이어 냉전 시대의 대립을 통해 분단에 이르기까지 고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끊임없는 종파적 갈등과 분열로 점철되어 왔던 데서 안타까움을 금할 없다. 외세의 침략이 민족의 단결을 이끌어 것이 아니라 융통성과 포용력 없이 이데올로기의 극단적 양상만 보여주며 내분에 휩싸여온 암흑의 시대를 살아온 것이다. 민족성을 앞세우는 사람들에게는 국수주의라는 낙인을 찍었고 개방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대주의라는 족쇄를 채워 서로 팽팽한 대립과 갈등으로 일관해 오지 않았나 싶다. 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아직도 우리가 어두운 터널을 지났는지는 확신을 못하겠다는 점이다.

꽤 오래 전 만일 어떤 외국인 인류학자가 한국의 민족성을 분석하는 책을 쓴다면 어떻게 묘사를 할 것인가 궁금해했던 적이 있다. 또한 한국인들이 자각하고 있는 한국의 민족성 혹은 민족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생각해 기도 하였다. 흔히 외국인들은 스테레오 타입에 취약하기에 한국의 민족성을 집어낸다 한들 정확한 시각이 아닐 수 있다. 한국인들이 느끼는 온갖 다양한 측면을 제대로 파악할지 우려가 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스테레오 타입일 지 언정 외국인들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연히 느낄 정도로 짙은 색깔의 민족성을 우리 가슴과 영혼에 간직하고 그리고 문화에 드러내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랬다. 이러한 민족적 정체성의 심화는 우리가 단지 외국 문화를 배척한다고 얻어지는 게 절대 아니다. 오히려 개방성과 민족성의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그래서 포용력 있고 융통성 있는 좋은 의미의 양면성을 유지하는 데서 얻어진다는 생각이다. 사대주의도 국수주의도 아닌 민족 정체성을 보존하는 가운데 실리적으로 외국 문물과 문화를 자국 문화를 발전시키는 촉매제로 활용하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것 아닌가 싶다.

포도 재배를 할 싹이 트기 시작해서 수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중 브레종(veraison)이라 불리는 시기가 있다. 포도가 청색에서 검정색으로 색깔을 바꾸기 시작하며 익어가는 시점이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당도와 산도가 점차 다른 패턴의 곡선을 그리며 역시 변화한다. 당도는 점차 높아지고 산도는 점차 낮아지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기 당도와 산도의 변화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두 곡선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그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이 당도와 산도가 적절히 밸런스를 이루는 시점이다.[vii] 처음 와인을 접했을 때는 단맛과 신맛이 공존한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고 서로 제로섬이라고 생각했다. 당도가 높아지면 그만큼 산도는 줄어들어 단맛이 강한 와인에는 신맛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그러나 와인 전문 서적들을 찾아보 한 병의 와인에서 단맛과 신맛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이 아주 일반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viii] 시실리아인의 정체성이 단맛과 신맛의 양면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와인 양조학을 공부하며 터득한 브레종 시기의 당도와 산도의 밸런스를 떠올렸다. 적어도 시실리아인들에게 민족성과 개방성은 제로섬이 아니라 서로 균형을 이룬 그래서 부드럽게 익어가는 포도 브레종 시기 정점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의 민족성과 개방성은 제로섬 양상을 보여주는 싶다. 민족성을 강조하면 개방성이 줄어들고 반대로 개방성을 주장하면 민족성에 상처를 입는 그래서 윈윈의 협동이 아닌 승자와 패자가 정해지는 일종의 게임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 브레종의 시기에 진입하기를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간절히 바랄 뿐이다.



[i] Bastianich, J. & Lynch, D. (2002). Vino Italiano: The Regional Wines of Italy. Clarkson Potter/Publishers. New York.

[ii] Bastianich, J. & Lynch, D. (2002). Vino Italiano: The Regional Wines of Italy. Clarkson Potter/Publishers. New York.

[iii] Keahey, J. (2011). Seeking Sicily: A Cultural Journey through Myth and Reality in the Heart of the Mediterranean. Thomas Dunne Books.

[iv] Keahey, J. (2011). Seeking Sicily: A Cultural Journey through Myth and Reality in the Heart of the Mediterranean. Thomas Dunne Books.

[v] Nesto, W. R. & Savino, F. D. (2013). The World of Sicilian Win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CA.

[vi] Nesto, W. R. & Savino, F. D. (2013). The World of Sicilian Win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CA.

[vii] Adams, D. (2010). Introduction to Wine and Winemaking Lesson 4: Growing Wine Grapes.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viii] Wine & Spirit Education Trust (2014). Wines and Spirits: Looking behind the L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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