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2장] 강한 보르도, 부드러운 보르도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격언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내 삶의 연륜이 쌓이면서, 특히나 보르도 와인을 접하면서 더욱 공감하게 된다. 강한 와인이 부드러운 와인을 만나 한층 높은 가치의 와인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집단사회는 곧잘 동질성을 중시하여 같은 생각, 같은 이념, 같은 문화를 가진 사람들끼리 어울리기 마련인데 우리가 떼지어 다니는 동물보다 진화했음을 확연히 느끼고자 한다면 강함과 부드러움, 한 스펙트럼의 양 끝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와인의 품질을 평가하는 여러 기준 중 하나가 복합성이다. 한 두 가지 향과 맛의 다소 밋밋하고 지루한 와인보다는 다양한 향미를 풍기는, 복합성이 높은 야누스적 와인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가기 마련이다. 이 복합성은 발효나 숙성과정에서의 기법 차이에 달려있기도 하지만, 여러 품종 포도의 혼합, 즉 블렌딩을 통해 얻어지곤 한다. 특정한 단일 품종의 이름을 내건 버라이어틀(varietal) 와인이라도 약간의 블렌딩을 해서 복합미를 높이는 일반적이다. 물론 품종의 구성 비율이 국가에 따라 다르지만 70 내지 80 퍼센트 이상이 되어야 하는 규제 기준이 있지만 말이다.[i] 일부 와인 애호가들은 단일 품종 와인이 복합미를 발휘할 때 더욱 높은 가치를 매기기도 하지만, 와인을 즐기는 것은 결국 감각기관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품종이 하나인지 다수 인지 여부에 중요성을 두는 것은 와인을 머리로 즐기며 부리는 고집 같기도 해서 나는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아무튼 이런 블렌딩 와인이 오래 전부터 가장 일반화 된 곳이 바로 와인의 본 고장, 프랑스 보르도(Bordeaux)이다. 보르도라는 지명을 들으면 자연스레 와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전 세계인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라는 사실을 볼 때, 아마도 프랑스 보르도 와인이 구세계를 거쳐 신세계들까지 뻗쳐가고 있는 와인들의 리더 격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지금은 보르도 와인이 무궁무진한 와인 세계의 단지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보르도를 모르고 와인을 논할 수는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지롱드 강을 비롯한 세 개의 물줄기를 중심으로 보르도는 좌안과 우안으로 나뉜다. 1855년에 만들어진 그랑 크뤼 등급체계에 속하게 된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보르도 좌안의 메독(Médoc)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다. 특히 지대가 높아서 오메독(Haut-Médoc)이라 불리는 지역에 그랑 크뤼(Grand Cru)급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다. 메독지방 외에도 그라브(Graves), 쏘테른(Sauternes) 등의 지방에서 자체 등급기준을 사용하기도 하며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보르도 우안으로 불리는 지역들은 포머롤(Pomerol), 생테밀리옹(Saint-Émillion), 앙트르 되메르(Entre-Deux-Mers) 등을 포함하는데, 좌안 중심의 1855년의 등급기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이 곳 역시 높은 가치가 매겨지는 와인들을 생산하는 인기 와이너리들이 다수 분포되어 있다. 와인은 기후, 지질, 토양, 자연 환경 등의 조합인 떼루아(terroir)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대서양을 바로 접하고 있는 보르도 좌안과 그보다 내륙 쪽에 위치한 우안이 서로 다른 떼루아를 가지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떼루아의 차이는 결국 좌안과 우안을 대표하는 품종의 차이를 낳았다. 좌안의 대표적인 품종은 강하고 거친 남성다운 와인의 대표격인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고, 우안은 과실향이 풍부한 부드러운 메를로(merlot) 품종을 주종으로 재배한다.[ii]

와인의 바디감이 강하고 묵직할 수록 남성적인 힘을 느끼기가 쉬운데, 카베르네 소비뇽이 이러한 범주의 대표 와인으로 일컬어 진다.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흔히들 카소라는 줄임말로 불리는 품종은 검고 두꺼운 포도껍질을 특징으로 한다. 와인의 떫은 맛을 뜻하는 탄닌(tannin) 포도껍질에서 나오는 , 포도줄기가 거친 타닌을  만들어낸다면 껍질에서 만들어지는 탄닌은 부드럽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와인을 발효하기 전의 제경 작업에서 줄기는 골라내 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생산되는 와인의 탄닌 성분은 주로 껍질에 의해 결정된다. 바로 발효를 마친 포도원액은 떫은 맛이 거칠고 강한데 1~2년의 숙성과정을 통해 탄닌이 부드러워 지고 바로 과정에서 탄닌 성분은 와인의 바디감을 묵직하게 만드는 기여한다. 진득하게 느껴지는 시각적 점성이 형성된다고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껍질이 두껍기에 많은 양의 탄닌 성분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숙성 과정을 거친 강한 바디감을 형성하게 된다. 물론 껍질의 탄닌 만이 바디감을 만드는 아니다. 포도알맹이 과육 또한 가볍고 무거운 정도를 가르는 와인의 바디감을 결정 짓는다. 카소는 포도알맹이가 작아서 과육을 통한 바디감은 그리 기대할 없다. 그래서 껍질은 얇지만 포도알맹이가 메를로의 경우 두드러진 특징이 풍부한 과실 향이지만 자칫 가벼울 있는 바디감도 알맹이의 과육이 향상시켜 준다고 있다. 카소의 블렌딩 파트너는 다양한 품종이 있으나 강한 성격을 다소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파트너로는 메를로 만한 품종이 없다 하겠다.[iii]

물론 와인에도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것이 있어서 카소는 강한 와인, 메를로는 부드러운 와인이라는 이미지가 수학 공식처럼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생산 지역과 양조 방식 등에 따라 어떤 메를로 와인은 일반 카소 와인에 비해 묵직하고 강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영화 <사이드웨이즈>의 주인공처럼 메를로 와인은 폄하하고 피노 누아 와인에 대해서는 더 없는 칭송을 하는 등, 와인은 특히나 즐기는 이들의 평가가 다소 주관적이기 쉬워서 딱히 이거다 싶은 확고부동한 정답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각에도 평균치라는 것이 있으니 강한 카베르네 소비뇽과 부드러운 메를로라는 이미지화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와인 애호가들이 수긍을 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두 품종을 다르게 이미지화하는 것은 카소와 메를로를 대립시키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양자의 블렌딩이 던져주는 메시지에 주목하기 위함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 이제 막 와인 양조 전문가 과정에 입문하여 화학 공부를 시작하였기에 와인의 오크 숙성 과정 중 이루어지는 블레딩이 어떠한 화학적 원리인지 하드코어과학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아직 요원하다. 그래도 내가 가진 인문학적 언어로 카소와 메를로 블렌딩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캐치하자니, 나의 눈길이 자연 이 사회의 역학관계로 향하게 된다.

여느 밀림 못지 않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고교 시절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교훈 아닌 교훈 아니었나 싶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 졸업 후 사회 생활을 통해 터득한 삶의 논리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게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쇠도 담금질을 통해 강해진다는 격언을 떠올리며 시련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고 스스로를 위로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회 생활의 연륜이 한 해 한 해 쌓여갈수록 터득한 논리는, 결론부터 말하면 부드러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강단에서 보낸 직장 생활 십 년을 세 분기로 나누어보면, 첫 번째 분기는 이제 막 발효를 끝낸 거친 카베르네 소비뇽의 시기였고, 다음 두 번째 분기는 오크 숙성을 통해 조금은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강한 카소의 시기, 그리고 이 시점에 이르는 세 번째 분기는 메를로가 블렌딩 되어 한 층 부드러워진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부드러워진 지금, 나는 가장 강해진 자아를 느끼며 산다. 지성과 윤리의 산실 대학이라고는 하지만 여느 사회처럼 위선의 모습을 여전히 발견할 수 있고, 게다가 대학 역시 조직사회이다 보니 나도 소위 의 입장에서 울분을 터뜨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삶의 시련이라는 것이 추구해야 할 대상은 아니지만 반드시 교훈은 남겨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선적인 인간 군상들을 접할 때 마다 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탐문하였고, 지금 어느 정도 해답을 만들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얼마 인문학 교양서로는 국내에서 최초로 밀리언 셀러의 저자가 되어 화제가 하버드 대학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의 책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이례적인 인문학 교양서의 선풍에 즈음하여 국내 평론가들은 <정의란 무엇인가> 대표되는 그의 프로파일에서 유추하며 부패한 사회에 대한 반감이 샌델 '정의주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고 입을 모았다. 나아가 분류하기 좋아하는 일부 평론가들은 그에게 진보적 자유주의자라는 레이블을 붙였고, 정치권의 좌와 우는 서로 샌델을 동화시키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가 그의 책을 접하며 발견한 베스트 셀링의 포인트는 약간 달랐다. 평론가들이 주장하듯 샌델이 사회를 부패했다고 진단 내린 것이 초점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 대한 지속적이고 일관된 긍정주의를 보여준다는 점이 독자들에게 부지불식중 어필을 했다고 보인다. 그가 가진 긍정주의와 낙관론을 엿볼 수 있었던 대목을 샌델의 책에서 발견한 두 가지 예시를 인용해 주장해 보겠다.

어떠한 맥락 이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스라엘의 유아원, 즉 어린이 집에서 보육 교사들이 프로그램이 끝난 후 어린이들을 늦게 데리러 오는 부모들에게 벌금을 매긴 적이 있다고 한다. 지각하는 부모들을 기다리는 것이 소모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다음 프로그램이 진행이 되지 않아 고안해 낸 방책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벌금 정책을 시행한 이후 지각하는 부모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샌델의 설명에 따르면 지각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일종의 벌금으로 처벌받았다는 믿음이 죄책감을 없애주었고 서둘러 아이들을 데리러 오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던 일말의 죄책감이 없어지면서 오히려 지각의 횟수를 늘려 놓았다는 것이다.[iv]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벌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 지각하지 않으려고 학부모들이 더욱 노력했을 것이데 그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다소 뜻밖이었다. 단순한 해석이지만 인간들이 돈에 얽매인 속물은 아니었구나 하는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나아가 개인이 가진 일종의 죄책감은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는 윤활유라는 샌델의 관점을 다시 해석해보면,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는 인간으로 전제한 것은 이미 선함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보는 시각이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 다른 예시는 유럽 국가의 폐기장 설치 관련 여론 조사에서 나온다. 유럽의 어느 마을에 정부가 핵 폐기장을 설치하기 위해 대대적인 여론 조사 작업을 벌였다. 설득을 위한 담론을 만들어 홍보를 한 후 각 시기마다 여론의 반응이 어떤지를 조사하였는데, 한 번은 공공성의 차원에서 주민들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 어차피 한 마을은 핵 폐기장을 설치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록 인체 유해와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 등 부작용은 있을지라도 대승적 차원에서 공공성을 위해 핵 폐기장 설치를 받아들이자는 주장이었다. 또 다른 시기에는 경제적 보상을 인센티브로 제시하였다. 핵 폐기장 설치가 개별 주민들에게 물리적, 경제적 피해를 주는 것은 확실하므로 정부가 그에 따른 경제적 보상을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자의 경우보다 자의 담론을 제시하였을 때 핵 폐기장 설치에 대한 긍정적 여론이 더 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v] 물론 설문 응답자들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응답 경향 보여준다는 측정 오류를 감안한다 할 지라도 이처럼 뜻밖의 결과가 나온 데 대해 샌델은 특유의 일관된 긍정주의를 설파한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무형의 가치들이 확연히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마도 딱히 뭐라고 말로 표현은 못해도 샌델의 독자들은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투사된 인간의 존엄성과 능동성에 주목하는 시각에 고무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현실에서는 비록 권력에 아부하고 복종하는,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은 속물적 세속인 이지만 우리가 가진 인간성의 본질은 돈으로도 없는 존엄성에 기반한다고 응원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는 드라마 <미생>이 만들어낸 이 시대 이천만 샐러리맨들의 공감 미학과는 또 다른, 아마도 존엄하고 능동적인 인간이라는 본질 자신과는 대비되는 현실 속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의 결과, 바로 죄책감이었을 듯하다. 일종의 카타르시스 아닌가.

대학교수 이다 보니 대학생들과 만나 학업 외적인 상담을 해주는 기회도 종종 있다. 대부분 취업이나 졸업 전망이 가장 심각한 고민인 경우가 많다. 이처럼 수업이나 상담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들이 생각하는 교수로서의 나의 이미지를 파악할 있었다. 반겨야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좋아한다는 학생들이 입을 모아 한결같이 얘기하는 것은 탈 권위적인 모습이 좋다는 것이다. 내가 너무 권위가 없이 가볍게 보인 것은 아닌가, 그들은 과연 평등한 관계를 원하는 것인가, 별별 생각을 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들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게 된 이유는 세상이 그들에게 너무나 척박했구나, 사회가 그들에게 너무 가혹했구나, 어른들이 그들에게 너무 강했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이 시대의 선생들이 학생들의 존엄성과 능동성을 살려주는 방향으로 교육하고 있지는 못했다는 반성이 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소위 갑질로 비난 받는 자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존엄성과 능동성을 무시하고 짓밟았기 때문일 것이다. 백 번 비난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갑의 횡포에 대한 오피니언 리더들의 비판과 비난은 넘쳐나니 이번에 나는 을을 돌아보고자 한다. 이는 총장 이하 대학교원들로 이루어진 위계적인 조직사회에서 평교수인 나의 위치이기도 하고, 유구무언의 행동을 일삼는 갑들에 대해서는 훈육하고자 하는 애정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연 을들은 갑의 횡포라는 사회의 비난에서 자유로울 있는가 묻고 싶다. 자신이 가진 존엄성과 능동성을 사회적 관습과 약자의 한계라는 이름을 빌어 스스로 짓밟지는 않았던가. 그래서 강자에게 복종하는 문화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주체, 권력의 인큐베이터가 되지 않았던가. 이름하여 을질을 하지는 않았던 지를 묻고 싶다. 권위적인 기업문화를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혁신의 주체는 기업의 오너나 임원들이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주체를 규정해 버리면 자신을 결국 혁신의 객체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혁신적인 변화와 성과에 대해 자기 몫을 챙길 자격을 스스로 휴지조각 버리듯이 내던지는 격이다. 나도 대학생 시절이 있었고, 90년대 초, 중반 대학생활을 기에 권위적인 교육을 받은 세대의 일원이. 가장 창조적인 예술작품들에 대해 작품의 사진을 바라보며 교수가 설명한 내용을 그대로 앵무새같이 암기하여 답안을 작성해야 하는 미술사 시간을 못 견디어 했던 젊은 청춘의 시절이 생각난다. 자칫 서구 예찬론으로 들릴 지 모르지만, 그래서 내가 영미권으로 유학 가서 가장 인상 깊었던 강의실 풍경은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이었다. 평가만큼은 쌓은 지식에 대한 엄격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나 적어도 하향식 커뮤니케이션 권위주의에 집착하지는 않았. 교수가 설파한 이론에 대해 소위 새파랗게 어린 대학생이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고 그러한 반론에 대해 교수가 격려와 칭찬을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교수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었고 학생에게 학점 보복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창의적인 생각과 사고를 자유롭게 교환하는, 그야말로 진취적인 풍경이었다. 만일 내가 나중에 강단에 서게 된다면 이런 진취적인 풍경만큼은 한국의 강의실로 옮겨놓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하며 늦은 밤 도서관 문을 나섰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흐른 2015년의 지금, 한국 사회가 여전히 권위적이긴 하지만 구태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질타가 주어지는 만큼 변화의 기미가 보인다고 진단 내리면 지나친 낙관주의일까.

갑이든 을이든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우리의 자화상을 돌아볼 때가 아닌가 싶다. 약자를 짓누르려는 강자의 권위주의도 구태지만 강자의 권력에 기생하고 아첨하며 동료 약자들을 배척하고 복종의 문화를 재생산하는 자들 역시 구태이긴 마찬가지다. 물론 와인의 세계에도 권위랄까, 권위주의랄까, 아무튼 그런 것이 존재한다. 내가 사랑하는 보르도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들이 일부 와인 애호가들에게 권위주의의 아성으로 비쳐지는 모습이 그래서 아쉽기도 하다. 보르도 좌안 메독 중심의 와이너리들은 1855년에 그랑 크뤼 등급체계를 만든 이후 1970년대에 한 유명 샤토가 승격되었을 때를 제외하곤 이제껏 한번도 변화가 없었다. 그랑 크뤼의 전통을 유지하여 일종의 마케팅 전략으로 삼기 위해서인지는 모르나 재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 십 년마다 평가를 다시 하여 등급의 부여를 조정하는 보르도 우안의 생테밀리옹 보다 훨씬 권위적으로 비쳐지는 이유이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그랑 크뤼 급 와인들보다 그보다는 와인 시장에서 한 수 아래로 가치가 매겨지지만 소비자들의 미감을 즉각적으로 반영하여 끊임없는 혁신을 추구한다는 크뤼 부르주아(Cru Bourgeois) 급의 보르도 와인들이 의외로 더 훌륭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지금 생각하면 보르도 최초의 혁신은 바로 블렌딩에 있지 않았을까 한다. 강한 카베르네 소비뇽의 거친 성격을 보완하기 위해 메를로와 같이 부드러운 미감을 주는 와인을 블렌딩하여 더 높은 가치를 추구했던 그 정신이 바로 보르도를 와인 세계의 리더로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단일 품종 와인을 고집하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유럽 중심인 와인의 구세계를 비롯하여 미국과 남미, 호주 신세계 조차 블렌딩을 와인 양조의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니 말이다. 인간이든 와인이든 혁신을 추구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우리가 보르도에서 배우는 혁신의 정신을 그랑 크뤼 와이너리들이 앞으로도 계속 보여줄지는 의문이다. 다만 지금 보르도 와인을 마시며 드는 생각은 인간도 자신의 내면에 카소와 메를로를 블렌딩했으면 하고, 인간들로 이루어진 조직 사회도 또한 강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모습으로 변모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i] Wine & Spirit Education Trust (2014). Wines and Spirits: Looking behind the Label.

[ii] Wine & Spirit Education Trust (2014). Wines and Spirits: Looking behind the Label.

[iii] Wine & Spirit Education Trust (2014). Wines and Spirits: Looking behind the Label.

[iv] Sandel, M. J. (2012). What Money Can’t Buy: The Moral Limits of Markets. Farrar, Straus and Giroux: New York.

[v] Sandel, M. J. (2012). What Money Can’t Buy: The Moral Limits of Markets. Farrar, Straus and Giroux: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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