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10장] 옐로우 와인을 향한 절규 비오니에

다소 짙은 색을 보여주는 화이트 와인인 비오니에는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한결같이 이국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나는 비오니에를 마실 때마다 나의 본질에 더 가까워지기를 그리고 타인에 대한 더 정성 어린 배려를 해주기로 결심했다.


이집트에서 기원하여 8천년에 이르는 와인의 역사를 돌아보면 고대의 유물과 유적들이 와인을 종교적 의식을 위해 사용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가령 고대 그리스에서는 배캐이(bacchae)라는 종교 축제가 있어서 자연 속에서 와인을 즐겼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학술적 토론을 하는 행사를 일컬어 심포지움이라고 하는데 역시 고대 그리스 시대에 기원하는 어원을 따져 보면 '함께 마시는 장소'라는 뜻이라고 한다. 여기서의 술이란 와인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물에 와인을 희석시켜 마시면서 지적인 대화의 촉매제로 사용했다고 한다.[i] 그래서인지 외국의 학술 모임에 참석해보면 빠지지 않고 와인이 등장하는 지적인 활동의 매개체가 되곤 한다. 유학 시절 경험을 돌아보면 세미나나 콜로키움이 끝난 참가자들이 가벼운 주류를 두잔 곁들이며 담소를 나누곤 하였는데 영국 국민 화이트 와인보다는 레드 와인을 무척 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 생활을 하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레드 와인을 압도적으로 좋아한다는 것과 화이트 와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식전 주라고 하는 아페리티(aperitif)와 후식과 함께 즐기는 디저트 와인 정도로 생각하는 탓인지는 몰라도 한국에서 화이트 와인을 주 요리와 함께 곁들이는 테이블 와인으로 즐기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문 것 같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서 레드 와인을 주로 즐기다가 화이트 와인은 와인에 관한 전문성을 연마하기 시작하면서 와인 시음회에서 그리고 배움의 차원에서 마셔 보았다.

프랑스의 경우를 보면 역시 보르도와 부르고뉴가 각각 대표 화이트 품종이 다르다. 보르도에서는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세미용(sémillon) 등이 주로 재배된다면 부르고뉴에서는 샤르도네가 맛좋은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 명성을 떨친다. 샤르도네는 흔히 샴페인이라 불리는 상파뉴(Champagne) 지방 스파클링 와인으로 생산되기도 하고 부르고뉴 내에서도 가격이 비싼 꼬뜨 도르(Côte d’Or) 지역을 제외하면 샤블리(Chablis)와 같이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는 와인으로 많이 생산된다. 이처럼 샤르도네가 더 대중적이긴 하지만 소비뇽 블랑 역시 만만치 않게 인기가 있는데, 캐런 맥닐은 두 품종이 극과 극의 캐릭터를 보여준다고 한다. 샤르도네가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라면 소비뇽 블랑은 제이미 리 커티스(Jamie Lee Curtis)라는 위트 있는 표현이다. 이는 샤르도네가 감미롭고 부드러운 캐릭터를 보여주는 반면 소비뇽 블랑은 다소 야생적인 신선함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야생미는 설사 버려진다 하더라도 자생적으로 자란다는 소비뇽 블랑의 특징에서 나 한다. 보르도에서는 거의 모든 화이트 와인이 이 소비뇽 블랑과 세미용을 블렌딩해서 만들어 진다. 달콤한 꿀의 향미를 주는 세미용이 소비뇽과 결합하면 특유의 야생적 신맛을 부드럽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블렌딩은 캘리포니아와 호주에서도 보편적으로 행해진다. 세미용은 특히 보르도 내 쏘테른 지역에서 스위트 와인으로 만들어지고는 한다. 얇은 껍질을 가지고 있어서 보트라이티스 시네리아(botrytis cinerea)라고 하는 특별한 곰팡이에 전염이 되기 쉬운데 바로 이 과정을 통해 값비싼 귀부(noble rot) 와인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ii] 
  
내가 이제까지 접했던 화이트 와인을 보면 샤르도네와 리즐링을 주로 시음했고 그 다음 소비뇽 블랑을 접해보았다. 그 후에 내가 좋아하는 화이트 와인 리스트의 가장 선두에 자리잡게 된 품종을 만나게 되었다. 비오니에(viognier). <와인 바이블>에는 이 비오니에에 관한 무척 재미난 묘사가 적혀있다. 미국 로스 엔젤레스의 한 레스토랑 주인이 묘사한 표현인데 “좋은 독일산 리즐링 와인이 아이스 스케이트 선수와 같다면 샤르도네는 미들급 박서와 같고, 비오니에는 민첩하고 우아하며 근육질로 완벽하게 몸매가 잡힌 아름다운 여성 체조선수와 같다”는 것이다. 비오니에는 산출량이 매우 적어서 귀하게 취급되는데 프랑스 론 지방이 원산지이며 품질 좋은 와인 생산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로버트 파커의 설명에 의하면 구전이라 확인할 길은 없으나 3세기 경 로마인들이 지금의 유고슬라비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훔쳐와 북부 론 지방에 심었다고 한다. 꽁드리유(Condrieu)가 향미가 매우 뛰어난 비오니에 화이트 와인으로 유명하고 꼬뜨 로띠(Cote Rotie) 지역에서는 시라 품종과 블렌딩 되기도 한다. 결국 레드 와인으로 만들어지지만 레드 품종과 화이트 품종이 블렌딩 되는 흔하지 않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원산지인 프랑스 외에 1990년대에는 미국에서도 인기가 폭발하여 생산량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재배하기는 매우 까다로워서 고르지 않게 익을 뿐더러 수확하는 시점에 보면 몇 시간 만에도 과도하게 익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와인으로 만들어지면 매우 우아한 향미를 뽐내는데 어느 시음 노트를 보더라도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비오니에의 캐릭터는 이국적이라는 점이다. 그 외에 꿀과 멜론류 과일, 열대과일과 같은 감미로움과 꽃 향의 우아함이 특징이고, 캐런 맥닐의 약간 과장된 표현에 의하면 “넋을 빼놓을 정도로” 크리미한 질감 역시 매혹적이라 할 수 있다. 시라와 블렌딩된 레드 와인의 경우도 비오니에 덕분에 마찬가지로 이국적이며 플로럴한 우아함이 가미된다.[iii] 다만 비오니에의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숙성을 오래 못한다는 사실이다. 로버트 파커는 심지어 고급 꽁드리유 산이라도 구매 후 2-3년내에는 시음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iv]

와인을 시음할 때 거치는 단계를 보면 눈으로 마신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색깔이 우선 감각기관 안에 들어오게 된다. 내가 비오니에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된 이유도 일단 색깔이 내 마음을 이끌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샤르도네와 리즐링, 소비뇽 블랑 등 기존에 마셔 보았던 화이트 와인에 비해 다소 짙은 색을 보여주었다. 과연 화이트 와인으로 불러도 될까 오히려 옐로우 와인으로 부르는 게 더 적합하지 않나 하는 엉뚱한 생각 언뜻 들 하기도 와인이. 그러고 보면 사실 색깔이 매우 옅은 화이트 와인도 엄밀히 말해 백색이 아닌 것은 맞지만 관례상 부르는 용어까지 부인은 못할 것이다. 와인을 다양하게 시음해 지금은 샤르도네나 소비뇽 블랑도 경우에 따라서는 비오니에보다 진하기도 하고 결국 양조 방식에 따라 색깔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헝가리산 토카이(Tokaji) 와인이나 프랑스 쏘테른의 귀부와인과 같은 스위트 와인에 비하면 농도가 덜할 수도 있으나 그래도 비오니에에 대한 평가가 짙은 레몬색 또는 황금빛을 보인다는게 일반적이긴 하다. 향과 맛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색깔도 비오니에를 이국적으로 만드는데 한 몫 했으리라 본다. 사실 비오니에를 시음하지 않는 한 거의 모든 시음노트 마다 등장하는 이국적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 지 난감하다. 아마도 대부분의 와인 애호가들이 일반적인 화이트 와인과는 사뭇 다른 독특함을 느꼈기 때문에 일관되게 언급하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이국적이라는 말에 가치 판단이나 선호도가 어떤 양상으로 개입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적어도 비오니에의 경우에는 이국적이라는 말을 통해 긍정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이국적이라는 말 속에는 항상 호감만 내포하는 것은 아닐 거다. 이국적이라는 느낌은 대상이 소수일 혹은 일반적인 양상과는 다르다는 점을 깨달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그러고 보면 국적이라는 표현을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경우를 따져 보면 외국인을 가리켜 말할 때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나는 이방인에 대한 정치경제학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제안한다.

사실 한국 사회에 다문화라는 개념이 중요한 사회 의제가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다문화 사회라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민족의 공존을 얼마만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논하기에는 한국 민족의 동질성이 너무나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이 한국 사회에 비집고 들어올 틈이 너무나 좁은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환영 받는 경우는 딱 두 가지이다. 하나는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을 통한 동남아시아 여성의 농촌 이주이다. 전지구적 글로벌화의 진행에 따라 경제적 부국과 빈국의 서열이 수직화되고 선진국의 경우 지식 중심 산업 사회로 재편되는 반면 제조업의 기반이 되는 육체 노동은 빈국의 국민들이 제공하는 시스템이 안착되었다. 한국의 공장 지대를 가보면 거리를 활보하는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서 이주해온 노동자들인 것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코리안 드림을 갖고 한국으로 온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용 조건이 합리적이지 못할 뿐더러 각종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심각한 피해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뉴스 보도를 접하면 나는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미국으로 가서 갖은 고생을 했을 한국 이민자들이 금새 오버랩 되어 침울해진다. 아무리 국제 사회가 약육강식의 논리로 움직이고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 할 지라도 선진국에서 하층 계급의 노동자로 살며 온갖 핍박을 받았을 한국 이민자들을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외국인 노동자들의 차별 문제를 그냥 손 놓고 보아서는 안될 일이다. 다행히 외국인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여론의 시선과 정부의 정책도 상당히 너그러워져서 그들이 억울하게 차별 받는 문제는 점차 나아지리라 생각한다.

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제도적 차별 문제보다 동남아 여성들의 결혼 이주를 훨씬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솔직히 혼기를 훌쩍 넘긴 농촌 청장년들을 위해 정부에서 동남아시아 여성들 이주를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나는 내심 못마땅해했다. 결혼 만큼은 사랑이 기반이 되어야 할진대 알선 받아 서로를 알 시간도 없이 즉석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는 짝짓기 시스템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국제 결혼을 하는 커플들이 사랑에 의해 매개가 되었다면 더없이 환영할 일이지만 다문화 가정의 가정 폭력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현실 앞에서 동남아 여성들의 이주를 이대로 마냥 반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한국 여성들에게 버림 받은 농촌 청장년들이 안쓰럽고 의지와 상관없이 국제결혼에 내몰리는 현실 매우 안타깝다. 하지만 농촌 독거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촌을 한국 여성들 혹은 국적에 상관없이 어떠한 여성들로부터도 외면당하지 않도록 가치 있는 요소를 만드는 것이 정부 정책의 기조가 되어야지 어찌 동남아 여성들에게 지참금을 지불하고 데리고 오는 전근대적 결혼 방식을 정부가 공식화 하고 있는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 결혼 생활의 현실은 냉혹할 뿐이고 고통은 대물림 되어 동남아 이주 여성의 2세들이 단지 이국적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고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아픔을 겪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저발전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해온 외국인들에 대해 마음으로 그리고 정책으로 배려를 해주지 않는 한 우리는 선진국으로 이민 간 한국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절대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너희 나라에서 냉대와 멸시를 받는 외국인들은 어쩌고 우리 나라에서의 한국인 권익을 옹호하는가 하는 비판에 대해 어찌 답할 수 있겠는가.

요즈음 방송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외국인들의 한국 문화 적응기는 여지 없이 이방인에 대한 정치경제학을 드러낸다. 출연하는 외국인들을 보면 대부분 한국보다 발전한 국가의 국인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내가 느끼는 제작진의 의도는 다소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제사회구성원 한국어를 열심히 익히며 한국 문화를 배우려 한다는 틀짓기를 통해 한국 사회의 국제적 지위가 그만큼 높아 졌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까지는 좋다고 치자. 하지만 선진국의 외국인들이 한국을 배우려 한다는 도취적 프레임이 영향력을 발휘하면 발휘할 수록 저발전국의 국민들이 한국 사회에 이주해서 겪는 갖은 고통과 수모는 잊혀져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방송사는 과연 깨닫고 있는지 의문이다.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이방인에 대한 정치경제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진국 국민에 대한 이국적인 감정에서 생겨나는 동경과 콤플렉스가 한 편에 있다면 저발전국 국민에 대한 이국적인 감정에서 생겨나는 냉대와 무시가 다른 한 편에 있는 이중적 정치경제학을 배려의 문화로 극복해 보기를 바란다. 같은 비오니에를 두고 로버트 파커와 같은 선진국의 명성 있는 와인 전문가가 이국적이라고 표현했을 때와 어느 저발전국의 와인 애호가가 이국적이라는 표현을 했을 때 국제사회에서의 경제적 지위가 다르다고 해서 와인이 주는 이국적 느낌의 이중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국적이라는 감정은 단지 다름에 불과할 뿐 거기에는 어떤 수직적 서열의 함의가 있는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와인에 있어서는 말이다. 어찌 보면 인류 사회의 원형을 추적해 보았을 때 경제라는 것과 거기서 비롯되는 권력은 인간이 덮어쓰고 있는 허울일 뿐 본질은 아닐 수가 있다. 와인을 순수하게 시음할 때는 적어도 우리의 허울을 벗고 내가 가진 본질에 가까워 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비오니에의 이국적인 느낌을 한껏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동등해 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i] Adams, D. (2010). Introduction to Wine and Winemaking Lesson 1: Introduction.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ii] MacNeil, K. (2001). The Wine Bible. Workman Publishing. New York.

[iii] MacNeil, K. (2001). The Wine Bible. Workman Publishing. New York.

[iv] Parker, R. M., Jr. (1987). The Wines of the Rhône Valley and Provence. Simon and Schuster: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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